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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인식을 찍는 사진기

신경림, '고장난 사진기'

by 인문학 이야기꾼

고장난 사진기

-신경림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찍어

내가 보기를 바라는 것도 찍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찍힌다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만이 나와 있어 나는 안심한다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 사진기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였음을

한동안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기를 나는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면서


배고픈 여우가 먹이를 찾다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합니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포도를 따먹기 위해 여우는 몇 번이나 점프를 했습니다. 그러나 포도는 여우의 입에 닿지 않았죠. 여우는 포도를 먹고 싶었지만 따먹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우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저 포도는 너무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라고 하면서 돌아섭니다. 이솝 우화 가운데 ‘여우와 신 포도’라는 이야기입니다.

먹고 싶은 생각과 따먹을 수 없는 현실 사이에 부조화가 발생한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을 변경하여 이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리언 페스팅어’가 이야기한 ‘인지부조화 이론’이죠. 따먹을 수 없는 현실을 변경할 수는 없으니 먹고 싶은 생각을 변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나중에 합리화를 도모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리언 페스팅어’의 생각입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야구팀은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2002년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나라는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긴 경기는 몇 번이나 보아도 신나고 자꾸 보고 싶지만 우리나라가 진 경기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게 되면 하이라이트를 반복해서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지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진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보고 싶지 않죠. 이것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과 실제 경기 사이에 부조화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 심리와 관련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찍지만 원하지 않은 부분도 찍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상된 사진을 볼 때는 보기 싫은 부분은 보지 않고 보고 싶은 부분만 봅니다. 보기 싫은 부분은 환시라고 애써 무시합니다. 보고 싶은 부분만 찍히기를 바라는 생각과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찍힌 현실 사이의 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서죠. 사진기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것은 다 담아 찍어냅니다. 보기 싫은 부분이 찍혔다고 해서 사진기가 고장난 것이 아닙니다. 사진기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지만 우리의 눈은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만을 보려고 합니다.

현실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데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하고,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진기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현실이 고장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고장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이 고장났다는 것을 안 것만도 다행입니다. 자신의 인식이 고장난 줄도 모르고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것은 점프력이 부족한 여우가 자신의 점프력을 탓하지 않고 맛있는 포도를 신 포도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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