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어느 장날'
-신경림
엽연초 조합
뒤뜰에
복사꽃이 피어 밖을 넘보고 있다
정미소 앞, 바구니 속에서
목만 내놓은 장닭이 울고
자전거를 받쳐 놓은 우체부가
재 넘어가는 오학년짜리들을 불러세워
편지를 나누어주고 있는 늦오후
햇볕에 까맣게 탄 늙은 옛친구 둘이
서울 색시가 있는 집에서 내게
술대접을 한다.
산다는 일이 온통 부끄러움뿐이다가도
이래서 때로는
작은 기쁨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어느 시골 장날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엽연초 조합 뒤뜰에 피어 있는 복사꽃이 밖을 넘보고 있습니다. 엽연초는 잎담배입니다. 담배 농사는 예전 농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중요한 수입원인 만큼 농사짓기가 쉽지 않습니다. 담배 모종을 옮겨심는 일부터 시작해, 특히 어른 키보다 큰 담배 줄기에서 담배잎을 따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손에 얼굴에 끈적끈적한 느낌이 달라붙고 온몸에 땀이 흘러내립니다. 담배잎을 긴 새끼줄에 끼워 건조실로 옮겨 매달아 놓고 며칠이고 불을 지펴 말려야 하는 일도 고역이죠. 노랗게 건조된 담배잎을 엽연초 조합에 납품합니다. 농부들의 노고가 보관된 엽연초 조합 뒤뜰에 복사꽃이 곱게 피었습니다. 밝게 핀 복사꽃이 밖을 넘보고 있습니다. 담배 농사의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모양입니다.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가고 싶은 농민들의 바람을 복사꽃이 대변하는 듯합니다.
정미소 앞입니다. 바구니 속에 든 장닭이 서러운 듯 울음을 토해냅니다. 시골 아낙은 이 장닭을 팔아 고무신도 한 켤레 사고 절인 고등어도 한 손 사야 합니다. 시골 아낙과 정이 들어 헤어지기 싫었는지 장닭은 굵은 울음을 거푸 울어댑니다. 생계를 위해 조상 대대로 살던 고향을 떠나야 하는 농부들의 마음이나, 시골 아낙의 생계를 위해 팔려가야만 하는 장닭의 마음이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농부는 매일 새벽을 알려주는 장닭과 함께 정든 고향 땅에서 대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삶이 무엇인지, 생계를 위해 닭도 팔아야 하고 고향이라는 아늑한 보금자리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골 장날 늦은 오후, 파장 무렵입니다. 5학년짜리 학생들 수업을 마칠 시간이기도 합니다. 우체부가 재 너머에 사는 5학년짜리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 편지를 나누어줍니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아이들의 누나와 삼촌으로부터 온 편지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아이들의 아버지의 친구인지도 모릅니다. 도시살이의 서러움과 옛 농촌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에 가득 담겨있을 듯합니다.
왁자지껄해야 할 시골 장날이 너무나 한산해 보입니다. 다들 도시로 떠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화자도 도시로 떠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도시에서의 삶을 돌아보니 부끄러움뿐입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간 화자의 삶이 나아지지도 않았습니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시골 장날 농촌에 살고있는 옛친구들을 만납니다. 옛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옛날의 추억들을 이야기합니다. 딱지치기를 하던 일도 이야기하고, 소 먹이러 가서 콩서리를 하던 일도 이야기합니다. 이런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이 삶의 작은 기쁨이 됩니다.
이제 시골 장날도 옛날의 흥성함은 없습니다. 그러나 옛 이야기를 간직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기쁨으로 장날의 흥성함이 살아나기를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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