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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쓰고 살아간들

신경림, '집'

by 인문학 이야기꾼

-신경림


생울타리에는 참새가 떼지어 살고

쌀광 속에는 구렁이가 웅크렸다.

울 안은 작약이며 황매로 치장을 하고

너저분한 쓰레기며 잡동사니는

화려한 줄장미로 감추었다.

낮에는 참새떼가 주인 행세를 하지만

밤이면 구렁이가 그 자리를 차고 앉아

좀처럼 비켜주지 않는


나는 모르겠다. 이 집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인가를.

어느새 그것이 내 속에 들어와

쌀광 속의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었으니.


사람의 성격[캐릭터 character]은 내면 가장 안쪽이 있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대신 주변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성격을 다른 포장지로 포장을 하기도 합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 포장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는 실제 자신의 성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다는 것이 ‘융’의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으면 어디까지가 가면이고 어디부터가 진짜 얼굴인지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화자의 내면 깊숙이 ‘구렁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시각으로 보면 ‘구렁이’는 화자의 캐릭터입니다. 구렁이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여러 가면을 번갈아 씁니다. ‘참새 떼’라는 가면을 쓰기도 하고, ‘작약이며 황매’라는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너저분한 쓰레기며 잡동사니’를 감추기 위해 ‘줄장미’라는 가면을 쓰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있을 때는 ‘참새’가 자신의 캐릭터인 양 행세하지만 홀로 있으면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구렁이’가 자신의 캐릭터임을 압니다.

‘참새’가 자신의 캐릭터인지 ‘구렁이’가 자신의 캐릭터인지 화자도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너무 오래 여러 가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자신의 본 모습인지 헷갈립니다. 여러 가면들이 내면 깊숙이 들어와 구렁이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으니 참새도 작약도 황매도 줄장미도 다 자신의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습니까? ‘페르소나’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는 것은 ‘페르소나’가 일반화되어 있다는 방증이 아니겠는지요? 사회적 관계에 따라, 인간관계에 따라 ‘구렁이’를 보여주기보다 ‘참새’를, ‘작약과 황매’를 보여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지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줄 수 있다면 구렁이 대신 참새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지요. 잡동사니 대신 줄장미를 보여주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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