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나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돠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목계’는 남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이자 5일장이 서는 장터였습니다. 5일에 한 번 장이 설 때 목계장터는 생필품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어울려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합니다. 5일장은 소비자 입장에서는 5일에 한 번 장이 서기에 5일장이지만, 판매자 입장에서는 이 장 저 장 떠돌아다니며 매일 물건을 팔아야 되기 때문에 1일장입니다. 판매자들은 매일 장마다 떠돌아 다니기에 장돌뱅이라고 하죠. 장돌뱅이들은 떠돌아다녀야 하는 숙명과 어디에라도 정착하고 싶은 욕망의 교차점 위에서 삶을 설계하는 사람들입니다.
장돌뱅이의 삶을 바라보는 이 시의 화자도 ‘구름’처럼, ‘바람’처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과 ‘들꽃’처럼, ‘잔돌’처럼 한곳에 정착해 살고 싶은 소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습니다. 그 교차점 위에서 때로는 떠돎의 방향으로, 때로는 정착의 방향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뎠을 뿐, 무게 중심이 어느 한 방향으로 확 기운 적은 없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길』이라는 기행시집의 후기에서 “나는 틈만 나면 돌아다니면서 나와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도 만나고 마을도 구경하고 친구도 사귀었다”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시인의 이러한 자유분방한 삶의 기원은 5일장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장돌뱅이의 삶에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인은 소중한 사람살이의 모습을,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시로 담아내기 위해 방물장수가 되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적 삶이 있으니, 산자락에 피어 있는 ‘들꽃’처럼, 강바닥에 놓여 있는 ‘잔돌’처럼 한곳에 정착하고 싶은 소망이야 당연히 있겠지요. 서리가 내리면 서리에 맞서지 않고 서리를 피할 줄도 알고, 물살이 모질면 바위 뒤에서 물살을 피할 줄도 아는, 한 번쯤은 세상 시름 다 잊고 ‘천치’가 되어 살아가고 싶은 바람도 당연히 있겠지요.
어쩌면 ‘바람’처럼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잔돌’처럼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숙명에서의 선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안고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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