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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신경림, '파도 - 여의도의 농민시위를 보며'

by 인문학 이야기꾼

파도 – 여의도의 농민시위를 보며

-신경림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 바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인가

그 성난 물결 단번에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씻어내리리 생각하면.


여의도 농민시위는 1989년 2월 13일 하룻동안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전국 농민대회입니다. 수세 투쟁과 농산물 제값 받기 투쟁을 전개한 농민시위입니다. 정부의 저곡가 정책에 분노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절박한 생존 문제를 알리기 위해 대규모 집회를 개최해 농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게 됩니다.

수세(물값)는 일제 시대 수탈의 상징입니다. 일제는 수리조합을 설치해 가혹한 수세를 거두어 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농지조합에서 엄청난 수세를 거두어 갑니다. 치수(治水)는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데 오히려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보다 더하다는 비판의식에서 수세투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결국은 2000년에 와서 수세는 완전 폐지됩니다. 농민들의 단합된 힘이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 오던 정책을 폐기처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순자(荀子)는 ‘君者舟也 庶人者水也(군자주야 서인자수야) 水則載舟 水則覆舟(수즉재주 수즉복주)’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물은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교수신문은 해마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습니다.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라는 뜻이죠. 순자의 위 이야기를 네 글자로 만든 것입니다. 백성이 정권을 뒤집어 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수천 년 전부터 해 온 생각입니다. 그 생각이 생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져 정권이 붕괴된 사례도 많습니다.

그런데 위정자들은 어리석게도 저 바다가 언제까지 저렇게 조용히 잠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위정자를 향해 해일처럼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화자는 황홀감과 신바람을 느낍니다. 한방울의 빗물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여의도 농민시위를 보며 빗물이 모여 만들어진 파도의 거대한 힘을 느낍니다.


노자(老子) 사상의 핵심으로 ‘상선약서(上善若水)’를 듭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죠.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지만, 그래서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하지만, 화가 나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무서운 녀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불탄 자리는 흔적이라도 있지만 물이 지나간 자리는 흔적도 없다’는 말이 만들어졌나 봅니다.

태풍이 바닷물을 뒤집어 바다를 새롭게 하듯이, 빗물들이 모인 파도의 거대한 함성은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낼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그리고 그 힘에 신바람이 나서 동참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있음을 이 시는 위정자들을 향해 일갈(一喝)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 Unsplash 무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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