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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신경림,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by 인문학 이야기꾼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

-신경림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은 찾아 걷는 내 걸음뿐.


일출(日出)은 늘 설렘을 줍니다.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니까요. 새해 일출은 특히나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새해 첫 일출을 보기 위해 혹독한 추위쯤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일출 명소에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같습니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마음가짐이 어제와 다르니 새해의 태양은 분명 어제의 태양과는 다릅니다. 한여름에는 기피의 대상이었던 태양이 새해에는 소망을 이루어줄 경외의 대상이 됩니다. 마음가짐이 대상을 새롭게도 만듭니다.


이사를 합니다. 17년 만의 이사입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좀 더 좋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7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17년 전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입니다. 17년 동안 나아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17년 전에 보던 풍경들이 지금도 그대로 펼쳐집니다. 그러나 17년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아니 17년 전에 볼 때는 느끼지 못했던 풍경들이 새롭게 펼쳐집니다.

연립주택의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아기들과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속 옷의 젊은 엄마, 플라타너스의 그루터기와 머리방의 간판은 17년 전에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는 풍경은 새롭게 보입니다. 풍경이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풍경도, 가난도, 낡음도 모두 새롭고 풍요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당나라 유학길에 오릅니다. 동굴 속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더듬더듬 물을 찾아 마십니다. 너무나 달게 마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해골에 괸 물이었습니다. 해골 물인 줄 알았다면 마셨겠는지요? 물 자체에 정(淨)과 부정(不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정(淨)과 부정(不淨)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에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일갈(一喝)하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름의 끝자락을 아쉬워하는지 매미가 자지러질 듯 울어댑니다. 매미 울음소리 자체는 맑지도 탁하지도 않습니다. 내 마음이 맑으면 매미 울음소리도 맑게 들리고, 내 마음이 탁하면 매미 울음소리도 탁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맑은 매미 울음소리를 찾아 헤맨다고 그런 소리를 찾을 수 있겠는지요? 맑고 밝고 새로운 것을 찾고 싶다면 발걸음으로 찾을 것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찾아야 함을 이 시를 읽고 알게 됩니다.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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