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신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 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에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르틀 때까지
복사꽃숲 나오면 들어가 낮잠도 자고
소매 잡는 이 있으면 하룻밤쯤 술로 지새면서
이르지 못한들 어떠랴 이르고자 한 곳에
풀씨들 날아가다 떨어져 몸을 묻은
산을 파랗고 강물은 저리 반짝이는데
화자는 특급열차를 타고 종착역을 향해 달립니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 KTX를 타고 가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종착역에 닿을 수 있습니다. 바깥 풍광들이 확확 지나갑니다. 풍광과 함께 봄꽃의 설렘도 휙휙 지나가 버립니다. 종착역에 닿아서 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봄꽃의 설렘만한 것이 종착역에는 없습니다.
삶의 종착역을 생각하면 빨리 종착역에 닿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종착역에 닿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종착역에 닿기까지의 과정 그 자체가 삶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화자는 차를 버리고 발이 부르틀 때까지 천천히 걷고자 합니다. 봄의 설렘을 느끼면서 복사꽃 아래서 낮잠도 한숨 자고 느릿하게 일어나 또 걷고자 합니다.
풀씨들은 종착지를 정해놓고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풀씨들은 바람에 몸을 온전히 맡깁니다. 그러다가 떨어지는 곳이 종착지가 되고 풀씨들은 그곳을 보금자리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이룹니다. 이들이 모여 세상을 푸르게 만듭니다. 땅에 떨어진 빗물은 목적지를 정해놓고 흐르지 않습니다. 흐름에 몸을 맡기면 어느 순간 강물이 되어 반짝이고 있습니다. 강물이 되어 반짝일 뿐, 바다를 향해 서둘러 달려가지 않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는 공자(孔子), 맹자(孟子)와 같은 ‘선생님 자(子)’의 칭호를 받아 주자(朱子)라 불립니다.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그는 ‘권학가(勸學歌)’라는 한시(漢詩)도 남깁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흐르니 젊은 시절에 열심히 공부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공부(학문) 대신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게 한다면 모든 학생, 모든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을 내용으로 읽힙니다. 다음 구절이 있기 때문이죠.
未覺池塘春草夢(미각지당춘초몽)
연못가의 봄풀이 채 꿈 깨기도 전에
階前梧葉已秋聲(계전오엽이추성)
계단 앞 오동나무 잎은 가을을 알리나니.
그렇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어제가 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 되었습니다. 붙잡아도 빨리 가는 세월을 굳이 특급열차를 타고 달릴 필요가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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