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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무의 행복과 슬픔

신경림, '裸木(나목)'

by 인문학 이야기꾼

裸木(나목)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화자는 지금 겨울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가려주던 나뭇잎 다 떨어내고 알몸으로 서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속속들이 드러내면서도 당당하게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습니다. 화자는 그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살갗이 터져 있습니다. 터진 살갗 사이에 여름의 폭풍우와 봄 새벽의 외로움과 붉어진 잎을 떨어내야 하는 가을의 아픔이 새겨져 있습니다. 뒤틀린 허리에는 여름의 무더위와 겨울의 혹한을 견뎌내기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습니다.

터진 살갗과 뒤틀린 허리를 숨겨주고 치장해 줄 눈이 내립니다. 그러나 나무는 눈으로 자신의 고달픈 삶의 흔적과 구질구질한 나날들을 숨기고도 치장하고도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삶이 부끄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의 도움을 받아 몸을 흔들어 오히려 눈을 털어냅니다. 눈을 털어낸 그 자리에 별빛을 받아 채웁니다. 터진 살갗도 뒤틀린 허리도 별빛이 위로가 되고 별빛으로 치유가 됩니다.


별빛으로 삶의 상처가 치유되었지만 나무는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이 울음은 삶의 고달픔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경림 시인은 ‘갈대’라는 시에서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울음은 존재 자체가 겪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슬픔에서 오는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의 공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무의 생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을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외면과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기 혼자만 있는 세계로 들어가면 자신의 삶에 대한 기쁨과 보람보다는 슬픔과 후회가 큰 것은 보편적 감정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이 굴러가지 않기 때문이죠. 그러나 1등을 원한다고 누구에게나 1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망과 결과 사이의 불일치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존재의 근원적 슬픔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반드시 좋은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돈도 수명도 사랑도 선악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된다고 행복할까요? 부족한 듯, 슬픈 듯한 삶,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고, 슬픈 부분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이 행복이 아니겠는지요?

[사진출처] 네이버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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