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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재미

신경림, '산에 대하여'

by 인문학 이야기꾼

산에 대하여

-신경림


산이라고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짓

따뜻한 숨을 자리가 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더라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봅니다.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우뚝 서 있는 크고 높은 산도 있고, 강을 따라 깎아지른 듯 험하고 가파른 산도 있습니다. 마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낮은 산도 있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순하디순한 길을 내어준 따뜻한 산도 있습니다. 산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무도 큰 나무가 있고 작은 나무가 있습니다. 돌도, 강도, 새도 크고 잘난 것과 작고 못난 것이 어우러져 자연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크고 높은 산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우뚝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삶의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고. 높은 산은 낮은 산만이 아는 삶의 재미를 부러운 듯 구경만 할 뿐이라고. 낮은 산은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고. 낮은 산은 비록 사람들이 너무 밟아 왕골 방석처럼 때에 절고,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어 있지만 휘파람새의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야만 산에 오른 듯한 등산가가 있는가 하면,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사람 사는 재미를 구경하는 유산가도 있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오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파랑길 45코스를 몇 년에 걸쳐 천천히 걷는 것을 삶의 재미로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가치로 볼 때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칡넝쿨처럼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사람 사는 재미이고 이런 재미는 큰 산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길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국 노래자랑’을 보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기도 하고, ‘TV쇼 진품명품’을 보면서 시골집에 혹시 골동품이 없나 찾아보기도 하고, TV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삶의 애환을 직접 느껴보기도 하는 그런 삶의 재미는 낮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들만 안다고 말합니다.

크고 높게 우뚝 솟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어야 하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견뎌야 하겠는지요? 그러기 위해서 낮은 산만이 아는 삶의 즐거움과 재미를 얼마나 포기해야 하겠는지요?

어쩌면 이 시는 낮은 산만이 아는 사람 사는 즐거움과 재미를 통해 낮은 길로만 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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