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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치유하는 삶의 그늘

신경림, '廢村行(폐촌행)'

by 인문학 이야기꾼

廢村行(폐촌행)

-신경림


떨어져나간 대문짝

안마당에 복사꽃이 빨갛다

가마솥이 그냥 걸려 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잡초가 우거진 부엌바닥

아무렇게나 버려진 가계부엔

콩나물값과 친정 어머니한테 쓰다 만

편지


빈집 서넛 더 더듬다가

폐광 올라가는 길에서 한 늙은이 만나

동무들 소식 물으니

서울 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 이름 두어 곳을 댄다


1960~70년대 호황을 누렸던 탄광산업은 석탄 수요가 감소하게 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탄광산업이 쇠퇴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대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남기고 간 집들이 늘어납니다. 탄광촌은 을씨년스러운 폐촌이 되었습니다. 이 폐촌을 찾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폐촌을 찾은 이 시의 화자도 한때 이 탄광촌에 살았습니다. 탄광산업이 쇠퇴할 즈음 화자는 동무들보다 먼저 서울로 떠났습니다. 서울살이도 그렇게 녹녹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탄광촌이 그립기도 하고 동무들의 근황도 궁금해 탄광촌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탄광촌은 폐촌이 되었습니다. 대문짝은 떨어져 나뒹굴고 있고, 가마솥은 벌겋게 녹이 슬었습니다. 부엌에는 잡초가 우거졌고 부엌 바닥에는 가계부가 버려져 있습니다. 친정 어머니한테 쓰다 만 편지도 함께 버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가 화자의 눈에 확 들어옵니다. 어머니의 걱정을 덜기 위한 편지의 내용에 상상이 미칩니다. 탄광의 인원 감축으로 인해 누군가는 탄광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내용도, 먼저 서울로 간 친구의 편지에 서울살이가 괜찮다는 내용도, 그래서 서울 가면 비빌 언덕이 있다는 내용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끝내 완성하지도 부치지도 못한 편지가 화자의 가슴을 때리지만 화자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감정을 절제한 채 담담하게 슬쩍 편지를 흘려둡니다. 편지의 내용을 상상하고 편지를 쓴, 이 집에 살았던 안주인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보라는 시인의 배려입니다.


빈집은 계속 이어져 있습니다. 이 집들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면서 올라가다가 한 늙은이를 만나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봅니다. 화자가 지금 살고있는 서울 산동네의 이름을 댑니다. 서울살이가 얼마나 팍팍하고 여유가 없는지 이웃 동네에 살면서도 동무의 소식도 근황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옥죄는 현실 때문에 잘살아보자는 새마을운동도, 국민소득 일만 달러의 구호도 이들에게는 그저 헛구호로 들립니다.


폐가의 안마당에 피어있는 빨간 복사꽃이 서울로 떠난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지원하는 듯합니다. 벌겋게 녹이 슨 가마솥의 아픔을 빨갛게 핀 복사꽃이 치유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서울로 떠난 이들의 삶이 ‘복사꽃’과 같이 아름답게 피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이 시에 투영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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