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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의 치료제

반구저신(反求諸身)

by 인문학 이야기꾼

‘교수신문’이 있습니다. 교수 사회를 대변하기 위해 몇몇 교수 단체들이 1992년에 창간한 주간신문입니다. 교수신문은 2001년부터 매년 연말에 우리나라 사회상을 상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를 선정하여 발표하고 있습니다. 교수신문에서는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했습니다. 이는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뜻입니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한자로 바꾼 신조어입니다. 교수신문은 특히 정치권에서의 ‘아시타비(我是他非)’를 비판하고 풍자하고자 이 성어를 올해의 성어로 선정했습니다. 청문회 대상자의 땅 투기, 논문 표절, 위장 전입은 거의 기본 메뉴에 해당할 정도로 보편적이고, 입시 비리나 음주운전은 특별 메뉴에 해당합니다. 이런 메뉴들을 남이 했을 때 호통을 치던 사람이 자신이 할 때는 떳떳하다고 강변합니다.

엄격한 법 적용으로 남을 털던 사람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나 측근에게는 느긋한 법 적용으로 무혐의의 결론을 내립니다. 집 세 채를 가진 사람이 집 두 채를 가진 사람에게 다주택자라고 비난을 합니다. 내가 하면 투자가 되고 남이 하면 투기라고 몰아세웁니다. 이런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역사는 꽤나 오래 되었습니다.

중국 진나라의 천하통일의 기반은 강력한 법 집행에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상앙(商鞅)’이라는 법가(法家) 사상가 있었죠. ‘이목지신(移木之信)’으로 유명한 상앙은 법을 어길 시에는 엄벌주의로 대처하였습니다. 특히 상앙은 ‘위에서부터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태자가 법을 어기는 일이 발생합니다. 태자를 직접 처벌할 수 없으니 태자의 스승들에게 코를 베는 의형(劓刑)과 이마에 먹물을 새겨넣는 묵형(墨刑)의 형벌을 가합니다.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릅니다. 의형을 당했던 태자의 스승도 복귀합니다. 상앙은 반란죄로 고발됩니다. 상앙은 야반도주합니다. 국경에 도착했지만 자신이 만든 법 때문에 성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여행증이 없어 여인숙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만든 법에 자신이 죽는다는 뜻의 ‘작법자폐(作法自斃)’라는 고사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이 순간 상앙은 법의 폐해가 무섭다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자신이 법을 집행할 때는 정의의 실현이었지만, 남이 법을 집행할 때는 불의(不義)의 실현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이후 상앙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자신이 만든 연좌제의 덫에 걸려 멸문지화를 당하고 맙니다. 상앙은 자신이 법을 집행할 때는 로맨스였는데, 남이 자신의 법을 집행할 때는 불륜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상앙은 자신이 만든 법과 법 집행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을 탓하면서 죽어갔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로남불의 치료제는 반구저신(反求諸身)입니다. 반구저신(反求諸身)의 태도는 치열한 자기반성에서 나옵니다.


‘반구저신(反求諸身)’은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남을 탓하지 않고 그 일이 잘못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서 고쳐 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반구저신(反求諸身)’은 『중용(中庸)』 14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중용(中庸)』 14장은 ‘불원불우장(不怨不尤章)’이라고도 합니다. ‘불원불우(不怨不尤)’는 ‘(군자는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장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차이를 견주고 있으니 소인(小人)은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 『중용(中庸)』 14장은 공자(孔子)의 말을 인용하여 군자(君子)의 자세를 활쏘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子曰 射有似乎君子 失諸正鵠 反求諸其身[(자왈 사유사호군자 실저정곡 반구저기신) -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활쏘기는 군자의 태도와 비슷함이 있으니, 그 정곡을 맞히지 못하면 돌이켜 그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났을 때 소인은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군자는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소인은 활이나 화살을 탓할 수도 있고, 바람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군자는 자기 자신의 수양 부족에서 찾는다는 것이죠. 군자에게 활이나 화살, 바람과 같은 것은 외부 요인은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지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게 한 이유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 지각을 했다는 것은 소인의 자세입니다. 자명종이 울리지 않아도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내공을 쌓는 것이 군자의 자세입니다. 우리의 삶 전부를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쌓아야 할 수양은 끝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시타비(我是他非)’의 인습을 고치려는 치료 방법은 조선시대 아동들이 보는 책인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에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不恨自家汲繩短 只恨他家苦井深 [(불한자가급승단 지한타가고정심) -자기의 두레박 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

우물은 깊을수록 물은 더 깨끗하고 맛있게 마련입니다. 우물이 깊으면 자신의 두레박 줄을 길게 하여 물을 길으면 됩니다. 우물이 깊으면 우물을 깊게 판 사람의 노고를 높이 평가할 일이지 누가 이렇게 깊이 팠냐고 따질 일은 아닙니다. 깊은 우물의 깨끗하고 맛있는 물을 먹기 위해서 두레박 줄을 길게 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내 몫으로 해야 되지 않겠는지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지요. 자신이 우물을 팠습니다. 더 깨끗하고 맛있는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고 깊게 팠습니다. 그런데 왜 깊게 팠냐고 탓한다면 기분이 어떻겠는지요. 남의 수고로움을 인정해주고 물을 긷기 위한 나의 수고로움은 내가 감당하면 그만입니다.

내로남불을 배우지 않도록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지만 그러나 이 아이들이 자라면 자신의 두레박 줄이 짧은 것은 탓하지 않고 우물 깊음을 탓하게 됩니다. 말로만 가르치고 어른부터 실천하지 않으니 수백 년 수천 년을 이어온 내로남불이 시대를 거듭하면서 오히려 진화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허향숙 시인은 사소한 돌멩이 하나에서 ‘반구저신’의 자세를 들춰냅니다.


산길 가는데

돌멩이가 발을 걸어 왔다

넘어질 뻔한 나는 돌멩이를 걷어차다가

그만 울컥, 했다


어쩌면 저 돌멩이는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일지도

서툰 마음을 불쑥 내밀었는지도


너도 그랬어

사랑한다는 말 대신

독한 말로 나를 넘어뜨리곤 했었지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원망하며 떠나온 나


차인 돌멩이를 제 자리에 놓아 주고

비탈진 산길을 오른다

-허향숙, ‘돌멩이’


산길을 걸어갑니다. 돌멩이가 발에 걸려 넘어질 뻔합니다. 화가 나서 돌멩이를 냅다 걷어찹니다. 넘어질 뻔한 것은 내 탓이지 저 돌멩이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어쩌면 돌멩이는 자신에게 발을 건 것이 아니라 말을 건 것인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말을 걸고 싶었는데 서툴러서 발을 건 셈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너’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서툴러서 다른 말을 합니다. 그 다른 말을 독한 말로 오해를 합니다. 헤어지고 싶어서 독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가득 안고 떠나왔습니다. 그러나 돌멩이가 발을 건 것이 아니라 말을 건 것임을 몰랐듯이 ‘너’가 사랑 고백에 서툴러서 다른 말을 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돌멩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온 돌멩이를 제자리에 갖다 놓듯이, 너를 원망하며 떠나온 나를 너의 곁으로 돌리고 싶습니다.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다가 평평한 길에 너를 내려놓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포츠도, 공부도, 취업도, 선거도, 승부(勝負)가 있고 합불(合不)이 있습니다. 승부가 있는 우리의 삶에서 패배의 원인을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고 잘못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성의 목소리가 벌써 2,500년 전에 나왔다는 것은 ‘반구저신(反求諸身)’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간직해야 할 좌우명(座右銘)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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