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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자세

역지사지(易地思之)

by 인문학 이야기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설화에서, 복두장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목숨을 걸고 대숲에 발설합니다. 비밀 지키기는 목숨을 걸 만큼 어렵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숨기고 싶은 임금님의 입장을 조금만이라도 헤아렸다면 대숲에 들어가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지녔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 필요도 없었고 타인의 신체 비밀이 퍼져나가지도 않았겠죠.

그런데 여기 온 동네 사람들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그 비밀을 묵묵히 지켜낸 우물이 있습니다. ‘이영광’ 시인의 ‘우물’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물은,

동네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우물이 있던 자리

우물이 있는 자리


나는 우물 밑에서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이영광, ‘우물’


옛날에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있었습니다. 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통샘이라고 부르기도 했죠. 공동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긷기도 하고, 먹거리를 씻기도 하고, 길손이 목을 축여 가기 위해 잠시 머물기도 하는 곳입니다. 우물은 마을 아낙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사랑방이기도 하고,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를 욕할 수 있는 공개된 장소이기도 하고, 물 한 두레박을 들이켜며 답답한 가슴을 하소연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물은 개나리 처녀와 나무꾼 총각의 사랑 이야기가 남몰래 무르익던 곳이기도 합니다.

우물은 누가 우물에 대고 어떤 고함을 질렀는지, 누가 어떤 사연으로 눈물을 흘렸는지, 누가 어떤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누가 누구의 험담을 했는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를 죄다 알고 있습니다. 누가 우물을 긷다가 두레박을 빠뜨렸는지, 누가 긴 줄에 갈고리를 매달아 빠뜨린 두레박을 건졌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우물이 대숲처럼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소문이라도 내면 온 동네 사람들의 비밀은 비밀이 아닌 게 됩니다. 그러나 우물은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물은 사람들의 각각의 입장을 다 알기에 들어주기만하고 비춰주기만 할 뿐, 비평도 하지 않고 평가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제 역할만 다할 뿐입니다.

화자도 우물을 닮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삶의 주체자로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남몰래 욕을 하는 사람도 있고, 험담을 하는 사람도 있고, 하소연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삶의 주체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도 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무라지도, 시비를 따지지도 않는 우물을 닮고 싶습니다. 사람들 각각의 사연을 다 알고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우물을 닮고 싶습니다.


『초한지(楚漢志)』의 한 토막을 보겠습니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천하를 두고 싸울 때, 한신(韓信)의 모사인 ‘괴통(蒯通)’은 이미 제나라의 왕이 된 한신에게 토사구팽의 죽음을 택하기보다 천하의 1/3의 주인이 되기를 요구합니다. 괴통의 말을 듣지 않았던 한신은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의 일등 공신이 되었으나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한신이 괴통의 말을 들었다면 유방의 한나라 통일을 1/3에 그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유방이 괴통을 불러 ‘천하삼분지계’의 계략을 한신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괴통을 심문합니다. 이에 괴통은 ‘천하의 도적놈인 도척(盜跖)의 개도 천하의 어진 임금인 요임금을 보고 짖는다[척구폐요(跖狗吠堯]]’고 하면서 개가 주인이 아닌 사람을 보면 짖는 것은 개가 자기 주인에게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하죠. 괴통은 그때는 자신도 오직 한신만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주인인 한신에게 충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유방의 부하가 유방을 위해 충언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편 것이죠. 유방은 괴통을 풀어줍니다. 역지사지의 논리가 유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것입니다.


홍세화 작가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홍세화 작가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던 중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됩니다. 파리에서 한동안 택시 기사 생활을 합니다. 프랑스에서의 택시 기사로서의 생활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과제를 담아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책을 냅니다. 이 책에 ‘오오까의 밀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옛날 일본 에도 시대에 ‘오오까’라는 판관(재판관)이 있었습니다. 오오까가 에도에 부임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에도의 귀족들 관리들 판관들 300명이 초대되었습니다. 잔치가 마칠 때쯤 오오까는 자신의 충복인 나오수까에게 300개의 밀감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나오수까는 300개의 밀감을 가져왔습니다. 오오까는 나오수까에게 300개가 맞는지 헤아려 보라고 했습니다. 한 개가 부족합니다. 오오까가 나오수까에게 호통을 칩니다. 자신이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항변합니다. 오오까는 형리에게 화로, 인두, 끓는 물 등 고문할 차비를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주위에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문이 제일 좋다고들 말합니다. 고문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오수까는 자백을 합니다. 처음에는 밀감에 손댈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먹음직스러워 하나를 먹었다고 하죠. 그러면서 어찌나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입 안에 군침도 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백을 마친 나오수까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주위의 빈객들은 오오까의 재판 솜씨에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오오까는 자신의 소맷자락에서 밀감 한 개를 꺼내 빈객들을 향해 던지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밀감을 훔친 사람은 자기라고 말합니다. 오오수까는 자신이 훔치지도 않은 밀감을 자신이 훔친 것처럼 그럴듯하게 꾸며 자백을 했다고 말하죠. 그러면서 고문에 의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썩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달라고 빈객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미명 아래 고문을 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이 밀감을 생각하라고 외쳤습니다. 판관들이 고문을 하기 전에 스스로가 오오수까가 되어보아야 한다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외친 것이 아니겠는지요.


유홍준 시인의 ‘우는 손’이라는 시도 역지사지의 원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 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 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유홍준, ‘우는 손’


아이가 매미를 잡은 것은 일종의 놀이입니다. 그러나 매미에게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7년을 땅속에 있다가 겨우 7일을 위해 세상에 나왔는데 아이에게 잡힌 겁니다. 이제 매미는 생존도 번식도 불가능합니다. 매미의 이런 절박함을 알기에 화자는 아이에게 매미를 풀어주라고 하는 겁니다. 아이 손에 잡힌 매미나 고문의 덫에 걸린 오오수까나 스스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오오까라는 판관도 고문의 두려움이 거짓 자백을 꾸며낼 수 있음을 알기에 고문에 의해 얻은 자백은 허위라고 외친 겁니다. 진실의 미명이 판관들의 공명심은 높일 수 있겠지만, 그들의 공명심에 희생이 된 사람들의 삶은 보상해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오오까의 이 외침은 먼지털이식 수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들의 역지사지의 자세를 끌어내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지사지의 자세를 지니지 않는다면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함’을 이 시는 경고하는 것이죠.


하상욱 시인의 『시로』라는 시집에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많습니다.


너는 충고를 기분 나쁘게 듣더라

너는 기분 나쁘게 충고를 하더라

-하상욱, 『시로』에서


좋은 뜻으로 한 말인데 넌 왜 그래?

넌 왜 좋은 뜻을 그런 식으로 말해?

-하상욱, 『시로』에서


내가 이렇게 사과까지 하잖아

너는 사과까지 그렇게 하잖아

-하상욱, 『시로』에서


충고의 내용은 대개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친구에게 듣는 충고는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나쁜 점을 들춰내어 충고하기보다는 좋은 점을 찾아 칭찬하는 것이 우정도 높이고 친구의 선행도 높이는 길이 아니겠는지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너는 기분 나쁜 충고도 좋게 말하네!’, ‘좋게 받아들이더라도 기분 나쁜 충고는 하지 말아야 했는데!’의 자세가 어떻겠는지요.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과는 하는 사람의 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사과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지요.

어쩌면 충고하고 사과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충고나 사과는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충고하고 사과할 위치에 있지 않으면, 어쩌면 그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공자(孔子)는 ‘그 위치에 있지 아니하면 주제넘게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不在其位 不謀其政(부재기위 불모기정)]’고 했습니다. 간섭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간섭받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섭받을 일도, 충고받을 일도, 사과할 일도 만들지 않는 것이 삶의 일차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나 간섭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이차적인 원리입니다. 이런 삶의 원리를 좌우명으로 삼는다면 더욱 풍성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지 않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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