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봉원(左右逢源)
봄이 되면 이름 모를 수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핍니다. 봄에 피는 들꽃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도 않을뿐더러 눈에 보이더라도 슬쩍 보고 지나치게 마련입니다. 꽃집에서 판매하는 꽃들은 슬쩍 보기에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래서 꽃을 선물하기에는 들꽃보다는 꽃집의 꽃들이 제격이지요. 들꽃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지요? 꽃잎 하나하나의 모양과 색깔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향기를 온몸으로 맡아본 적이 있는지요? 마음에 관심을 두지 않고 슬쩍 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는 것이 나태주 시인의 생각입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 주변의 모든 사물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보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나태주 시인의 생각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이런 삶의 원리를 ‘풀꽃’이라는 시에 담았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대학(大學)』 〈정심수신(正心修身)〉편에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 식이부지기미) : 마음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올바른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시청(視聽)’과 ‘견문(見聞)’은 둘 다 ‘보고 들음’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TV를 보는 것은 ‘시청’이라 하고, 여행에서 보고 듣는 것은 ‘견문’이라고 합니다. 온 마음을 다해 보느냐 그냥 슬쩍 보느냐의 차이가 이들 단어에 녹아 있는 겁니다. 이렇게 온 마음을 다해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면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고 ‘풀꽃’은 말합니다.
김춘수 시인도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대상이 꽃이든 사람이든 내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대하면 그 대상도 마음을 열고 나에게 진정으로 다가온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국어 교과서에서도 밀려난 ‘고은’ 시인이라는 분이 쓴 『순간의 꽃』이라는 시집이 있습니다. 이 시집에는 제목도 없이 아주 짧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시편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어린 토끼 주둥이 봐
개 꼬리 봐
이런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니
어린 토끼 주둥이나 개 꼬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슬쩍 보면 그냥 주둥이고 꼬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어린 토끼가 먹이를 먹기 위해서 입을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개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항에 든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1분간만이라도 지켜보면 지느러미들의 움직임과 아가미의 움직임의 사랑스러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 시인의 인식입니다.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인식입니다.
‘삶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기적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고 아인슈타인은 말했습니다.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사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토끼 주둥이도, 개 꼬리도, 바람에 나폴거리는 풀잎 하나도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순간의 꽃』에 실린 두 줄짜리 시 한 편 더 보겠습니다.
모이 쪼는 병아리 부리
내 공부 멀고 멀어라
어미닭이 3주 정도 알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옵니다. 입도 눈도 노란 털도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어미닭이 먹이를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 병아리는 태어나면서 바로 두 발로 흙바닥을 헤치면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 먹습니다. 야생의 세계에서는 눈도 뜨지 못한 못한 벌거숭이 새끼에게 어미새가 먹이를 물어다줍니다. 어미새에게 먹이를 받아 먹는 야생의 조류들과 비교하면 병아리의 공부는 태어나면서부터 완성형입니다. 화자 자신의 공부가 병아리의 공부보다 못하다는 화자의 인식이 엄살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전 농촌에서의 병아리 부화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입니다. 이런 일상에서 앞가림의 척도와 공부의 완성도를 생각해 낸 것은 어떤 사물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니겠는지요.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군자가 올바른 도리로 대상을 깊이 파고드는 것은 스스로 깨우쳐 대상에 담긴 원리를 터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우쳐 터득하게 되면 터득한 바에 확신을 갖게 되고, 확신을 갖게 되면 실력이 깊어지고 실력이 깊어지면 주변의 흔한 사례에서도 근본 원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스스로 깨우쳐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주변의 흔한 사례에서 근본 원리를 만난다’는 것을 따로 떼어서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대상에 대한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대상에 담긴 아름다움과 대상에 내재한 원리를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산길을 가다보면 큰 나무 꼭대기에 얼기설기 지은 까치집을 자주 만납니다. 슬쩍 보고 지나치면 까치집은 그냥 까치집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래 보면 여러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손도 없고, 설계도도 없고, 교육의 기회도 없는 까치가 어떻게 집을 짓는지 그 과정 하나하나가 궁금합니다. 까치집의 내부의 모습과 내부 재료도 궁금합니다. 태풍이 불면 날아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뿌리가 뽑힐지언정 까치집은 날아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까치집의 건축 기법이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집의 완공 시점과 산란 시점을 어떻게 조절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보면 대상에 대한 기본 원리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주변의 흔한 사례에서 근본 원리를 만난다’는 ‘좌우봉원(左右逢源)’의 의미가 아니겠는지요.
텔레비전을 통해 프로야구를 관람할 때였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이 어떻게든 상대 투수의 공을 뻥뻥 쳐 많은 점수를 내주기를 바라며 응원합니다. 상대 투수가 위기에 몰렸습니다. 안타 하나 맞으면 투수 교체도 가능한 시점입니다. 홈런이든 안타든 쳐 주기를 바라면서 TV에 몰입합니다. 그 순간, 상대 투수의 아내와 그의 어린 딸이 남편과 아빠를 기도하듯 간절히 응원하는 모습이 TV 화면에 가득 잡혔습니다. 여기에서 안타를 맞으면 남편은 강판이 되고, 어쩌면 내년에는 일자리를 잃을 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제가 응원하는 팀이 안타 대신 병살타를 쳐도 좋다는 생각이 슬쩍 들었습니다. TV를 통해 보는 운동 경기에서도 ‘어떤 자세로 상대방을 볼 것인가’라는 삶의 원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좌우봉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사인 시인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아주 흔한 경험에서 좌우봉원의 원리를 발견해 냅니다.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 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에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김사인, ‘오누이’
버스에 오누이가 타든 노부부가 타든 슬쩍 보면 평범한 일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화자는 오누이를 자세히도 봤습니다. 버스에 타고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냅니다. 빈 자리 하나 나니 오빠는 어린 동생 데려다 앉힙니다. 같이 앉자고 하는 동생의 행동 하나하나와 퉁을 놓는 오빠의 의젓함을 놓치지 않고 봅니다. 오누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오누이의 행동을 자세히 보게 했나 봅니다. 오누이의 행동을 자세히 보니 오빠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과 동생이 오빠를 생각하는 마음, 그 예쁜 마음도 다 보입니다. 세상을 약간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오누이의 이런 예쁜 마음을 볼 수 있고, 오누이의 이런 예쁜 마음으로 세상을 가득 채울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篇)’에서 ‘三人行必有我師(삼인행필유아사)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귀감(龜鑑)으로 삼고, 나쁜 것은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을 수 있으니 어쨌든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맹자(孟子)는 더 나아가 주변에 있는 모든 사물이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맹(孔孟)의 이런 좌우봉원(左右逢源)의 자세를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으면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