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규거직(拔葵去織)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천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줍니다. 『사기열전(史記列傳)-순리열전(循吏列傳)』에 등장하는 노나라 재상 ‘공의휴(公儀休)’라는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순리(循吏)’란 법을 지키고 이치를 따르는 관리를 뜻합니다. 순리열전에서 공의휴의 행적은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지금은 다양한 버전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재상 공의휴가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 갔는데 아내가 아욱국을 맛있게 끓여놓았습니다. ‘아욱국은 문 닫아 걸고 먹는다.’, ‘아욱국을 반년만 먹으면 포동포동 살이 쪄서 외짝문으로 못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합니다. 아욱국은 공의휴가 평소에도 좋아하던 국인지라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반쯤 먹었을 때, 아욱이 어디에서 났느냐고 아내에게 묻습니다. 아내는 텃밭에 아욱을 심어 오늘 수확했다고 대답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공의휴는 밥 숟가락을 놓고 텃밭으로 달려가 아욱을 죄다 뽑아 버리는 것입니다. 아내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을 뿐이지요.
며칠이 지났습니다. 공의휴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아내가 베틀에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공의휴는 아무 말 없이 베틀을 내다 버렸습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텃밭에 아욱을 재배한 것이며 손수 베를 짠 것인데, 칭찬은 못해줄망정 이렇게 망칠 수 있느냐며 남편에게 따졌죠. 공의휴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국가에서 녹을 받아 생계를 능히 유지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욱을 재배하고 베를 짜면 농부와 직녀(織女)는 어찌 생계를 유지하겠소?”
이것이 ‘아욱을 뽑고 베틀을 버린다’는 뜻을 지닌 ‘발규거직(拔葵去織)’의 유래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공의휴의 마음은 오늘날 공직자나 CEO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목욕탕에 갈 때 항상 자기 집 옆에 있는 허름한 목욕탕에 갑니다. 한두 걸음만 더 걸으면 물 좋기로 소문난 온천장입니다. 왜 온천장을 마다하고 허름한 목욕탕을 이용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한참 뜸을 들이더니 “온천장은 내가 안 가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만 이 목욕탕은 내가 안 가면 문 닫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친구는 목욕탕과 같은 논리로 30년째 허름한 이발소의 단골손님이기도 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이용이 목욕탕과 이발소의 수익에 얼마나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 친구와 같은 마음들이 건강한 사회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배려는 자기소개서에 쓰기 위한 인성 영역의 스펙이 되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있는 실천적 의미를 지닐 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만난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덕유산의 겨우살이를 보며’라는 부제가 붙은 ‘아름다운 배려’라는 작품입니다.
단 한 개의 뿌리도 없이
다른 나무의 가지 꼭대기에 얹혀서
가까스로 삶을 지탱하는 겨우살이
그래도 그는 자신이 여름 내내 농사지은 노란 열매를
새들의 몫으로 기꺼이 떼놓습니다.
그 열매로 덕유산 새들 너끈하게 겨울 한 철 납니다.
지상에서 더부살이 사는 우리는 뭇 생명을 위해 언제 열매 한 톨이라도 내놓았는지요.
-안병기, ‘아름다운 배려 – 덕유산 겨우살이를 보며’
나무는 겨울이 되면 자기 잎들도 모질게 떨쳐냅니다. 먹여 살릴 수분이며 영양분 공급이 힘들기 때문이죠. 힘들어도 자기를 찾아온 손님, 겨우살이는 내칠 수가 없습니다. 품어 안고 힘들게 먹여 살립니다. 그것이 고마워 겨우살이는 자신의 열매를 새들에게 내어놓습니다. 새들은 겨우살이가 베푼 노란 열매로 척박한 겨울을 견뎌냅니다. 새들이 있음으로 겨울 나무는 잎들이 없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새들은 배설을 통해 겨우살이의 번식을 돕습니다.
약효가 좋다고 소문난 겨우살이를 채취하기 위해 인간은 숙주 나무의 밑둥치를 자릅니다. 내 열매 한 톨 내놓지 않는 이들이 겨우살이를 품고 사는 숙주 나무를 본받지는 못할망정 밑둥치까지 잘라서야 되겠는지요? 자기 잎들은 떨쳐내면서도 겨우살이를 품고 사는 지혜를 이천수백 년 전에 이미 아욱을 뽑아버리는 행동으로 실천한 재상 공의휴의 삶이 새삼 감동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