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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 가득한 봄날의 풍경

신경림, '봄날'

by 인문학 이야기꾼

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잔을 들면 소주보다 먼저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샅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아흔과 일흔 모녀(母女)의 생업과 처녀들의 나들이와 벚꽃이 어우러진 어느 봄날의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북한산 어귀에서 등산객과 유산객을 손님으로 빈대떡과 소주를 파는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있습니다. 모녀(母女)의 집안이나 가족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북한산 어귀 늙은 소나무 아래에서 노점상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리고 삶의 마지막 고샅까지 생계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모녀는 생계를 위해 빈대떡과 소주를 팔고 있지만, 그러나 이 생계 활동이 모녀에게 삶의 에너지와 봄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처녀들의 나들이는 봄날의 풍경을 더욱 싱그럽게 수놓고 있습니다. 이 처녀들은 봄날을 맞아 북한산 어귀에 소풍을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벚꽃이 있고, 저녁놀이 있고, 냇물이 있고, 빈대떡이 있고, 소주가 있고, 무엇보다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녀들은 벚꽃에 취하고, 저녁놀에 취하고, 빈대떡과 소주에 취해서 벌겋게 단 볼을 냇물에 식히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들려준 그네들의 삶의 이야기에 취해서 볼이 벌겋게 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은 더 이상 모녀 관계가 아닙니다. 자매를 거쳐 지금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수직의 관계에서 수평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길손들이 그렇게 규정해 주고 모녀도 서로 친구가 되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가 된 듯합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니라 모녀유친(母女有親)입니다. 여기 손님으로 온 처녀들도 모녀와 수평적 관계가 되었습니다. 사고파는 매매(賣買)의 당사자가 아니라, 노소(老少)의 관계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친구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수평적 관계는 늙은 소나무와 저녁놀과 하얀 달도 벚꽃과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며 봄날의 풋내를 발산하고 있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라는 시에서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하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라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라고 긍정적으로, 상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의 삶을 ‘풋내 가득한 봄날’로 만들고,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로 만드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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