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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이야기꾼 Sep 04. 2023

서로의 적막함을 달래며

김종삼, '묵화(墨畫)'

          묵화(墨畫)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의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墨畫)는 먹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대상의 섬세한 모습은 생략한 채 단순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묵화의 특징이죠. 오히려 그림의 형태가 단순할수록 섬세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으니 묵화가 주는 울림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힘든 하루를 소와 함께 보냈습니다. 할머니도 목이 마를 텐데 소에게 먼저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너에게 힘든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고, 네가 있어서 내가 적막하지 않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소도 할머니에게 눈을 끔뻑입니다. 자신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힘들고 적막한 자신을 위로해 주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소는 이미 소가 아니라 자식보다, 할아버지보다 가까운 가족입니다. 소는 할머니 당신의 고단함과 적막함보다 자신의 고단함과 적막함을 위로해주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눈 끔뻑임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자세한 내력은 생략되었습니다.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이 소와 함께 얼마나 힘든 농사일을 해왔는지, 자식들은 대처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할아버지는 언제 하늘나라로 갔는지는 행간에 숨겨 두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독자는 상상력으로 할머니의 과거와 가족 관계를 복원하면 됩니다. 지금 할머니에게는 대처로 나간 자식들을 대신해,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린 할아버지를 대신해 이 소가 당신의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입니다.   

   

  반려동물은 흔히 애완동물이라고 합니다. 애완동물은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며 기르는 동물이죠. 그러나 할머니에게 소는 반려동물이지만 애완동물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힘든 하루하루를 위로하고 서로의 적막함을 달래주는 반려자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에게는 소가 있기에, 소에게는 할머니가 있기에 발잔등이 부을 정도로 생활은 힘들어도 더 이상 적막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먹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쓸쓸한 듯한 모습이지만 읽을수록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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