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채우는 간격의 소중함

더불어 살아가기

by 인문학 이야기꾼

『맹자 교양 강의』의 저자 ‘푸페이룽[傅佩榮]’ 교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푸교수의 어머니는 일곱 자식을 낳고 쉰이 되던 해에 척추 수술이 잘못되어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예순 둘이 되었을 때 푸교수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만 대학으로 돌아왔습니다. 푸교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마작을 주말마다 두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마작을 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푸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의 자식 외에도 여섯 가지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아내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사회에서는 한 시민이고, 같이 어울리는 친구 중 하나이자, 우리 형제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모두 더해보니 마침 일곱 가지 역할이 되는군요. 일주일은 7일이고, 어머님에게는 일곱 자식이 있고, 저는 해야 할 일곱 가지 역할이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님을 모시고 즐겁게 보내는 것이 딱 맞지 않을까요?”

-『맹자 교양 강의』 중에서


어머니는 푸교수의 말을 이해하고 이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만 모셔도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합니다. 푸교수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맹자(孟子)’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맹자(孟子)』에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다’는 뜻의 ‘여민동락(與民同樂)’이란 말이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어려운데 군주가 자기만 즐긴다면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군주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한다면 군주가 즐기는 것을 백성들도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 맹자의 생각입니다. 인의(仁義)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백성들에게 요구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어야 여민동락이 된다는 겁니다. 푸교수는 맹자의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아, 군주가 백성의 형편을 살피듯 어머니는 자식의 형편을 살펴야 된다는 논리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 설정을 명확히 했나 봅니다.

푸교수의 어머니가 자식을 독점하기 위해 매일 마작을 두자고 고집을 부렸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헐거워질 수도 있었겠죠. 탄탄한 관계를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이라도 적당한 간격은 필요해 보입니다. 안도현 시인(1961년~ )은 ‘간격’이란 시를 통해 탄탄한 인간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 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안도현, ‘간격’


이 시에서 ‘숲’은 공동체를 ‘나무’는 개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무는 어깨를 맞댈 정도로 간격이 없다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나무가 적당한 간격이 있을 때 울창한 숲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통해 인간관계도 적당한 간격이 있을 때 훌륭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적당한 간격이 있을 때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죠. 부모가 자식을 향해 ‘내가 저를 어찌 키웠는데……’ 쯤 되면 간섭이 되고, 집착이 되어 나중에는 산불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푸페이룽 교수의 일곱 역할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으로 볼 때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가까운 모자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깨닫게 된 거죠. 어머니의 깨달음이 부모와 자식의 건강한 관계를 만든 또 하나의 축이 된 셈이죠.

저는 시를 읽는 것은 보물창고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보물을 합법적으로 가져오는 행위라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은 ‘울창한 숲이 되기 위해서는 나무들 사이에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수고로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우리는 공짜로 얻습니다. 시인이 얻은 깨달음은 보물이나 마찬가지죠. 시는 시인이 애써 발견한 보물을 모아놓은 보물창고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숲에 들어가보는 수고로움도 없이 시를 통해 깨달음이라는 보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를 읽는 것은 보물창고에서 자신에게 맞는 보물을 마음껏 가져오는 행위가 아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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