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2구간, 운봉~인월(2025.12.28)

by 인문학 이야기꾼

지난 9월부터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걷기는 이번이 네 번째다. 계절에 맞게 걷기 순서를 살짝 바꾸어 이번에는 제2구간(운봉~인월)을 걸었다. 제2구간은 9.9km로 짧은 구간에 속하며 가장 평탄한 길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난달보다 한 시간 늦은 8시에 부산에서 출발했다. 소풍 가는 초등학생처럼 들뜬 분위기가 버스 안을 점령했다. 뒤에 앉은 일행이 삶은 달걀을 건네준다. 따뜻했다. 마음의 온기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 22명을 태운 버스는 10시 30분, 제1구간 종점이자 제2구간 시점인 남원시 운봉읍 서림공원에 도착했다. 서림공원의 ‘서림(西林)’은 ‘운봉마을의 서쪽에 있는 숲’이라는 뜻이다. 서림공원은 자연적 가치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은 휴식과 문화 공간으로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서림공원의 충혼탑과 부부 돌장승, 그리고 당산나무는 갑오년 동학혁명과 지리산 빨치산의 아프고도 슬픈 역사를 가슴에 간직한 채 텅 빈 겨울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림공원.jpg <지리산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채 서림공원의 당산나무는 텅 빈 겨울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림공원을 지나 지리산 둘레길 2구간 걷기가 시작되었다. 그저께 올겨울 들어 최강 한파가 전국을 강타한 한겨울이지만, 오히려 적절한 기온에 바람마저 자서 겨울을 즐기며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푸른 람천을 따라 조성된 둑방길은 십승지길이라는 표지를 달고 있었다. 십승지길은 전쟁이나 흉년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전국 10곳의 명당 중 하나로 운봉(雲峰)을 꼽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람천은 쪽빛처럼 푸른 시내의 뜻을 지닌 ‘藍川’이 맞는지, 물이 자주 넘치는 시내라는 뜻의 ‘濫川’이 맞는지 일행 중 한 사람과 약간의 언쟁이 있었지만,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지명의 한자 표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람천은 중간중간에 얼음으로 덮인 구간이 있었지만 얼음이 녹은 구간에는 잔잔한 주름살 같은 물살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물 위에서 청둥오리들이 놀다가 사람 소리에 놀랐는지 푸드덕 떼지어 수면을 박차고 오른다. 오른쪽 저 멀리로는 지리산 서북능선의 봉우리들이 서로의 높이를 다투면서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지리산 저 봉우리 중에 바래봉, 팔랑치, 세걸산, 고리봉이 있을 텐데 그냥 같은 봉우리로 보였다. 둑방길 옆의 벚나무들은 나뭇잎을 다 내려놓는 것으로 겨우살이 채비를 마쳤다. 겨울 벚나무는 우리 일행을 벗 삼아 겨울의 추위와 외로움을 잠시나마 달래는 듯 보였다.


둑방길(출발).jpg <나뭇잎을 다 내려놓고 겨우살이 채비를 마친 둑방길 벚나무를 따라 걷고 있다>

십승지길이라 명명된 둑방길은 람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라는 교량을 건너 람천의 왼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왼쪽으로 ‘신기마을’이 보였다. 신기(新基)마을은 ‘새 삶을 시작하는 터전’을 뜻한다. 임진왜란 때 비교적 전란의 피해가 적은 호남지방에 정착지를 찾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새터’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신기리(新基里)’가 되었다.

둑방길은 람천을 왼쪽에 두었다가 다리를 건너 오른쪽에 두었다가 하면서 동편제 마을로 이어졌다. 반쯤은 언 람천의 수면에는 유유상종의 겨울새가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다. 겨울새 옆에는 마치 거대한 어미 거북이 새끼들을 거느리고 강을 헤엄치는 모습과 같은 바위가 람천 수면에 몸의 반을 드러내고 있었다.


람천의 청둥오리(표대장).jpg <람천의 잔잔한 수면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청둥오리>

둑방길은 우리 일행을 ‘동편제 마을’로 안내했다. 동편제 마을은 람천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람천의 오른쪽은 ‘전촌마을’ 왼쪽은 ‘비전마을’이라고 동편제마을 종합안내도가 설명하고 있었다. 전촌마을에서는 북 모양의 ‘동편제 마을’이라는 표지석만 보고 람천을 건너 왼쪽으로 들어섰다.

‘황산대첩비지’가 겨울의 맑은 햇살을 받고 있었다. ‘황산(荒山)’은 이곳 산 이름을 말하며, ‘대첩(大捷)’은 크게 이겼다는 뜻이고, ‘비지(碑址)’는 비석이 있던 터란 의미이다. 이곳은 고려말 고려군의 최고 지휘관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긴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 싸움으로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나라를 구한 최고의 명장이란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조선 선조 때 이곳에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파괴한 것을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고 입간판이 증언하고 있다. 이곳에 ‘파비각(破碑閣)’이 따로 세워져 있었는데, 파비각에는 파괴된 비석 조각들을 모아 안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일제의 야만적인 문화 말살 정책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황산대첩비지.jpg <푸른 하늘을 이고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는 황산대첩비지>

황산대첩비지에서 조금 걸어 ‘동편제 마을’이라는 북 모양의 앙증맞은 표지석이 서 있는 비전(碑前)마을로 들어섰다. 우람한 판소리 가락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마을 바로 옆에 황산대첩비가 있어서 ‘비전(碑前)마을’로 불리게 되었으리라. 황산대첩비를 세운 후, 이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始祖)로 알려진 가왕(歌王) 송홍록 명창과 현대 판소리사에서 독보적인 음색을 가진 국창(國唱) 박초월 명창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편제와 서편제는 판소리를 구분하는 명칭이다. 동편제는 운봉, 구례 등 섬진강 동쪽에서 전승되었으며, 호쾌하고 장엄하며 남성적인 힘과 우직함이 특징이다. 서편제는 보성, 나주, 진도 등 섬진강 서쪽에서 전승되었으며, 섬세하고 애절하며 여성적인 한의 정서를 강조한다.

표현 방식이나 정서의 방향성으로 볼 때, 동편제는 현대의 록 음악에, 서편제는 현대의 발라드 음악에 비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춘향가’에서 이몽룡의 암행어사 출두 장면을 노래할 때는 빠른 장단에 호쾌하고 당당하게 노래하는 것이 효과적이기에 동편제의 요소가 강하며, 춘향이 옥중에서 겪는 고통을 노래할 때는 슬프고 애절하게 노래하는 것이 효과적이기에 서편제의 요소가 강하다.

동펜제마을.jpg <호쾌하고 장엄한 판소리 가락이 들려오는 동편제 마을>

송홍록이나 박초월 같은 판소리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매우 엄격하고 고된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판소리는 악보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소리를 귀로 들으며 따라 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배워야 한다. 그러니 음악적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암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판소리 배우기는 불가능하다. 판소리 광대(소리꾼)는 인물도 좋아야 하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소리 실력이 있어야 한다. 소리가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득음(得音)했다고 하는데, 폭포수 아래에서의 혹독한 득음 과정은 영화 ‘서편제’를 통해 잘 알려졌다.

영화 ‘서편제’의 한과 애절함을 되새기며 둑방길을 걸었다. 왼쪽으로 ‘군화(軍花)마을’이 보였다. 군화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은 군인들과 관련이 있다. 1961년 대홍수 때 화수리(花水里) 지역이 큰 피해를 입어 이재민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이때 인근에 주둔하던 군인들의 복구 작업으로 화수리 이재민들의 거주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군인(軍人)들이 지어준 화수(花水) 마을, 나아가 군인들이 지어준 마을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살겠다는 의미를 담아 ‘군화(軍花)마을’로 명명했다고 한다.

군화 마을을 지나자 둑방길은 아스팔트 길로 이어졌다. 차와 사람이 도로를 공유하는 구간이라 다소 위험해 보였다. 짧은 구간이었지만 찻길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길에 어울리는 사람길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도로변에 특이한 형태의 탑과 비석이 보였다.

왼쪽에 있는 탑은 벽돌로 쌓은 3층 전탑이었는데, 원명당 종범대선사 부도탑(圓明堂終範大禪師浮屠塔)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었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탑을 말하니, 탑 안에 원명 스님의 유골이 모셔져 있으리라. 탑의 상륜부에 석조보살입상을 올려두었다. 보살은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은 갖추었지만 중생 구제를 위해 부처 되기를 미룬 성자이니 원명 스님이 보살이라는 의미로 탑의 상륜부를 그렇게 만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른쪽에는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南無大覺世尊釋迦牟尼佛)’이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석의 내용은 알 길이 없었다.


부도탑.jpg <원명당 종범대선사 부도탑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는 3층 전탑의 부도탑>

다소 숙연해진 마음이었지만 앞선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뛰는 걸음으로 걸었다. 화수교라는 대각선 형태를 다리를 건너니 ‘GNKC리조트’라는 간판의 육중한 건물이 보였다. ‘지리산 힐링 휴양센터’ 입주 예약중이라는 현수막이 리조트 영업이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듯했다. 우리 일행은 건물 주위에 삼삼오오 앉아 점심을 먹었다. 둑방길 평지만을 걸어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나 밥맛은 꿀맛이었다.

오후에는 산길 걷기로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 조금 가니 바윗돌에 새긴 ‘옥계호(玉溪湖)’라는 표지석이 이 위에 옥계호수가 있다고 알렸다. 이렇게 깊은 산중에 웬 호수가 있을까? 저수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완만한 오르막을 올라갔다. 둑의 높이와 둑의 길이가 저수지 규모를 넘어선 듯 보였다. 규모와 풍광으로 보아 저수지가 아니라 호수가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바래봉에서 발원된 맑은 물이 ‘옥계(구슬처럼 맑은 시내)’를 이루고, 그 물이 흘러 이곳에 안착해 한 폭의 수채화와 같은 옥계호(玉溪湖)가 되었다.

비교적 고지대의 운봉 들판에 벼농사가 활발한 것은 옥계저수지의 안정적인 용수 확보 때문이란다. 집중 호우 때 산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급한 물줄기를 잠시 가두었다가 서서히 방류함으로써, 옥계저수지는 하류 마을의 홍수 피해를 예방하기도 한단다. 옥계호는 동편제라는 문화와 황산대첩이라는 역사와 주민들의 실제 삶을 아울러 운봉고원의 고지대에 호수의 모습으로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옥계호를 지나 넓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겨울은 가을을 완전히 밀어낸 것이 아니었다. 몇몇 나무는 아직 마른 잎을 달고 있었다. 마른 잎들은 가을을 떠나보내기 못내 아쉬운 듯 약한 바람에도 나풀거리고 있었다. 겨울 산에 숨어있는 가을의 흔적과 온기를 희미하게 느끼며 걷는 사이에 ‘흥부골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겨울 산길.jpg <가을의 흔적과 온기를 희미하게 느끼며 완만한 오르막의 겨울 산길을 걷고 있다>

판소리 ‘흥보가’에 흥부가 쫓겨나 떠돌다가 ‘지리산 기슭 어느 산모퉁이’에 움막을 짓고 산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그곳이 대략 이곳 정도가 된다고 보고 ‘흥부골 자연휴양림’이라 명명한 듯싶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세속을 벗어난 청정함을 뿜어내고 있어서인지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나무와 잣나무 숲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니 아스팔트 길이 나타난다. 숲의 고요함은 일상의 정겨움으로 바뀌어 길손을 맞이한다. 일상의 정겨움을 느끼며 걷는 사이 ‘월평마을’에 도착했다. 월평마을은 달오름마을로도 명명된다. 월평마을의 담벼락에 ‘뒤에는 주산(主山)이 반달형이라 달이 빨리 뜨고, 앞에는 넓은 들이 놓였으니 월평이라 하였음이라’라고 월평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었다.

지리산을 울타리 삼아 아담하게 조성된 집들과 마을 사람들의 삶을 소박하게 담아낸 월평마을의 벽화가 길손의 마음과 시선을 정겹게 붙잡는다. 사람과 자연의 조화, 동심을 불러내는 풍경들이 마을 담벼락마다 그려져 있었다. 마을이 자연과 하나가 되어 동심을 느껴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달오름마을은 지난번 지리산 둘레길 4구간 걷기에서 ‘지리산나물밥’이란 옥호의 식당에서 지리산나물밥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피곤을 씻어낸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월평마을의 벽화.jpg <숲의 고요함이 일상의 정겨움으로 바뀌어 길손을 맞이하는 월평마을의 벽화>

람천을 가로지르는 ‘구인월교’ 앞에 오니 1시 30분이었다. 3시간이 걸려 3구간 9.9km 걷기를 마쳤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남원 광한루를 감상하고 저녁을 먹는 것이 좋겠다고 산행 대장이 의견을 내자 일행은 모두 환한 얼굴로 남원 광한루로 향했다.

광한루 정원은 하나의 작은 우주를 지상에 구현했다. 정원의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하고, 연못 안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섬처럼 조성하여 땅 위에 신선 세계를 만들었다. 연못에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를 구현해 사랑의 만남을 완성했다.

이 광한루 정원은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시작되고 완성되는 판소리 춘향가의 배경이다. 판소리의 인기는 소설 춘향전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수많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만들었고 현재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오작교 아래 연못에는 원앙이 무리지어 다니면서 방문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었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의 대리자로 내세우기에 원앙이 제격이었으리라. 원앙은 물 위에서도 연못 가장자리에서도 사랑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춘향이 타던 그네와 춘향이 벌받던 형틀, 몽룡이 춘향이와 사랑을 나누던 월매집 등 문학 속의 공간을 현실 속에 재현한 광한루 정원은 많은 방문객의 카메라 세례를 연신 받고 있었다.


광한루원앙(표대장).jpg <광한루 연못에서 춘향과 몽룡의 사랑을 대신한 원앙은 사랑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지리산 둘레길 걷기의 덤으로 광한루 정원을 관람하고 ‘흥부골남원추어탕’이란 옥호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토종 미꾸라지를 통째로 갈아, 우거지를 가득 넣어 끓인 추어탕 한 그릇은 오늘 걷기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듯싶었다. 괜히 남원추어탕이 아니었다.

이른 저녁 덕분에 부산에도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7시 10분이였다. 만보기에 23,000보가 찍혔다. 비교적 짧은 구간에 비교적 평탄한 길이었지만, 둘레길 곳곳에 스며있는 선조들의 발자취와 숨결을 통해 역사적 자긍심과 문화적 감수성을 체감한 하루였다. 좋은 길 안내해 준 산행 대장과 좋은 길 함께 한 일행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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