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제 9구간(덕산~위태) 2026.01.25

by 인문학 이야기꾼

겨울의 추위가 지리산을 엄습하는 계절이지만 지리산 둘레길 걷기는 언제나 설렌다. 그 설렘이 황량할 수 있는 겨울 들길과 겨울 산길을 꽃길로 만들어준다. 안도현 시인은 ‘소풍길’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따라오지 마라 했는데도

끝까지 따라오는

요놈, 꽃다지

또, 꽃다지


아무런 감흥 없이 매일 다니던 등굣길도 소풍 가는 소풍길이 되면 길섶에 있는 이름 없는 풀도 다 꽃다지로 보인다. 마음이 꽃밭이니 지리산 둘레길까지 가는 버스 안도, 둘레길도 꽃길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허튼말은 아닌 듯하다.


한겨울이지만 꽃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지리산 둘레길 9구간 시점인 ‘덕산(德山)’에 도착했다. 이번에 걸어야 될 길은 9.7km로 비교적 짧을 거리에, 부산에서 가까운 산청 구간이라 부산에서 9시에 출발해 11시 조금 넘어 시점 덕산에 도착했다.

최강 한파라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청명한 하늘을 통과해 온 겨울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날씨였다. 날씨에다가 마음까지 포근해서인지 오늘 걷기도 축제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먼저 남명기념관 성성문(惺惺門) 앞에서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깨닫고 깨닫는다는 뜻의 성성문을 들어가니 남명기념관과 남명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동상 뒤로 눈 덮인 지리산 천왕봉이 이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명 동상.jpg <남명 조식 선생 동상 뒤로 눈 덮인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조선 중기 유학자로, 관직을 거부하고 평생 학문 수양에 전념한 지식인이었다. 남명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과 나이도 동갑이었지만, 학문적으로도 어깨를 나란히 하여 둘은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퇴계와 남명이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없지만, 서로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했으며 인품과 학문적 깊이를 서로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다. 퇴계가 도덕적 자기완성과 내면적 수양을 강조한 데 비해, 남명은 내면적 수양에 그치지 않고 일상과 사회에서의 실천을 중시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다. 곽재우, 정인홍 등 남명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것은 실천을 중시하는 스승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남명과 관련된 볼거리나 유적은 이곳 덕산(산청군 시천면)의 사리(絲里)와 원리(院里)에 있다. 사리에는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 여재실, 묘소가 있고,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山天齋)는 남명 선생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다. 산천재는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천재를 지을 때 옆에 매화나무를 심었는데 이를 ‘남명매(南冥梅)’라 한다. 남명과 제자들은 천왕봉의 기상과 매화의 기운을 받아 학문에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매일 했으리라.

산천재 남명매.jpg <천왕봉의 기상과 남명매의 기운을 받고 있는 산천재의 모습>

덕천강을 따라 조성된 둑길에 올라 서쪽을 향해 걸었다. 둑길은 힘차게 솟은 소나무와 상록성 참나무가 강물의 푸름과 조응해 겨울을 싱싱하게 수놓고 있었다. 이곳 지자체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맨발 걷기용 황톳길과 세족장 그리고 자갈길까지 마련해 길손이 강과 나무를 보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배려했다. 겨울이라 맨발 황톳길을 사용하지 못한 것이 다소 아쉬웠다.

덕천강 둑길에는 ‘너로 인해 내 하루가 행복해’,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등의 글귀가 길손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글귀 너머로는 눈 덮인 천왕봉이 인자한 미소로 길손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겨울의 한기가 있었지만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응원 글귀.jpg <덕천강 둑길의 글귀는 길손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덕천강을 가로지르는 원리교(院里橋)와 시천천(矢川川)을 가로지르는 천평교(川坪橋)를 눈앞에 두고 징검다리를 건너갔다. 지리산 중산리에서 흘러오는 물은 원리교 아래를 지나고,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은 천평교 아래를 지나는데 이 두 물이 한데 모이는 두물머리가 ’양단수‘이다. 이 양단수를 바라보며 남명 선생은 시조 한 편을 남겼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남명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두류산 양단수를 녜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구나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두류산(지리산) 양단수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말을 옛날부터 듣고 이제야 찾아가 보았다. 맑게 흐르는 물에 복숭아꽃이 둥둥 떠내려오고 산그림자까지 잠겨 있구나. 아아! 이곳이야말로 바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겠는가!]


강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부족한 수량에다가 겨울 강 모습이라 시조의 정취를 살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옛 선비가 바라보던 그 양단수를 시대를 넘어 이렇게 같은 공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무릉도원에 서 있는 듯싶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학문 수양에 매진하면서도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삶을 병행했으니 이를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한다. 쉼도 도(道)라고 생각한 조선 선비들의 관점으로 본다면 둘레길 걷기도 도(道)의 일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행과 남명과 퇴계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양단수 징검다리(표대장).jpg <두류산 양단수 부근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마음이 바로 무릉도원이리라>

덕천강을 중앙선으로 하여 유(U)턴하듯 징검다리를 건너 조금 오니 출발점인 남명기념관이 강 건너편에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양단수를 보여주기 위한 배려가 유턴의 둘레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송하중태길이라 명명된 덕천강 둑길을 따라 서쪽을 향해 걸었다. 송하중태길은 송하마을과 중태마을을 잇는 길이리라. 길섶에는 산수유나무가 강둑을 따라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잎은 다 떨어지고 말라버린 붉은 알들이 앙증맞게 산수유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송하중태길은 길은 감나무길이라는 별칭을 붙이고 싶을 정도로 감나무들이 많았다. 감나무는 맨몸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손가락보다 가는 여리디여린 나뭇가지는 겨울 한파가 몰아쳐도 얼지 않는다. 보호 장구 하나 없이 동상(凍傷)에 걸리지도 않고 혹독한 추위를 견딘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렇게 여린 나뭇가지가 감꽃의 움을 품고 있으면서 감꽃의 움을 얼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무에 발열 장치가 있기 때문이리라.

어느 시인은 나무에는 ‘나무 발전소’가 있다고 했다. 그 발전소가 있기에 봄에 감꽃이 피고, 감꽃이 떨어진 자리에 감이 열리고, 감이 익는다고 했다. 감나무에 발전소가 없다면 그렇게 연약한 감꽃이 그렇게 두꺼운 나무껍질을 뚫고 꽃을 피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무의 발전소가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로 나무가 겨울을 지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익게 하고 나뭇잎을 떨어지게 한다는 상상력이 시인의 안목이리라.

감나무밭.jpg <감나무가 겨울에도 얼지 않는 것은 나무에 발열 장치가 있기 때문이리라>

시인의 상상력을 상상하면서 걷는 사이 중태마을에 도착했다. 중태(中台)마을은 산과 산 사이에 놓인 평평한 터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지형으로 보아 제대로 명명된 것 같았다. 중태마을 중태안내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에 과일을 먹었다. 겨울 햇살이 도시락에 스며들어 춥지 않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중태마을 뒷산에는 지난해 3월에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인한 피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산의 아랫부분은 고사리밭이었는지 완전히 타버려 민둥산이 되어 있었고, 산의 윗부분에 있는 소나무들도 밑둥치가 불에 타 검은색으로 변해 산 전체가 앙상한 뼈대만 남은 형상이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이렇듯 큰 재앙으로 다가오니 ‘산불을 조심하자’라는 확성기 차량의 방송을 예사로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중태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산불의 흔적이 길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산불 현장)

산불은 다행히도 이곳 감나무밭까지 침범하지는 않았다. 중태마을의 어느 농가에 들러, 요행히 화마가 비켜 간 그 감나무밭에서 수확한 감으로 만든 곶감을 일행이 앞다투어 샀다. 산청 고종시 곶감은 높은 일교차와 청정한 바람이라는 지리산의 자연이 빚어낸 작품으로, 예부터 임금님께 진상되던 명품이었다. 겉은 쫄깃하고 속은 부드러운 데다가 씨가 없고 당도가 높아 맛도 좋고 먹기 좋아 지금은 전국적으로 많이 찾는 특산품이 되어 있다.

중태마을을 지나 오르막길에 올랐다.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감나무밭에서 수확된 감을 실어나르는 길로도 사용되는 듯하다.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가파른 길 중턱에 자리잡은 아담한 교회가 길손을 반긴다. 마을은 유점마을, 교회는 ‘SDA 유점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는 놋그릇(유기)을 만들어 파는 점방이 많아 ‘놋점골’로 불렸다고 한다. 놋그릇을 만들기 위해서는 숯과 맑은 물이 있어야 하는데,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이 마을은 숯과 물이 풍부해 유기 제작의 최적지였다. 지금은 유점(鍮店)이란 이름이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유점교회.jpg <가파른 길 중턱에 자리잡은 SDA 유점교회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밝고 맑게 빛나고 있었다>

SDA는 ‘Seventh-day Adventist Church’의 이니셜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재림교회)를 뜻한다. SDA는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개신교 계열의 기독교 교단으로, 토요일에 예배를 보며 성경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고,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핵심으로 한다. 한국에서 재림교회는 특히 교육과 의료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삼육중고등학교, 삼육대학교, 삼육서울병원, 삼육부산병원(위생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유점마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가늘게 흐르는 중태천을 옆에 끼고 가파르게 나 있는 포장도로를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이번 걷기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산길이다. 산이 겨울의 한기를 품어서인지, 오르막을 올라서인지 몸에서 후끈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겉옷을 벗어 배낭에 넣었다.

겨울 산은 무방비 상태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드러낸다는 것은 비웠다는 것이고, 이는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겨울은 때가 되면 기꺼이 봄으로 온산을 채운다. 봄은 여름으로 여름은 가을로 채움을 더해간다. 그러다가 겨울이 오면 온산을 비워버린다. 저절로 비움과 채움을 반복해야 할 산이 산불의 화마(火魔)로 인해 비워진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중태재.jpg <화마의 상처가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는 중태재>

화마가 할퀴고 간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산은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활엽수의 낙엽들이 산길을 점령한 모습에서도, 검게 타버린 소나무 밑둥치와 회색으로 탈색된 대나무의 줄기 사이사이에서도 화마의 시간 이전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나무들의 안간힘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안쓰러움을 느끼며 걷는 사이 중태재에 도착했다.

이번 구간이 짧은 거리임에도 난이도를 하(下)가 아니라 중(中)으로 분류하는 것은 이 중태재 때문이었다. 중태재는 산청군 시천면과 하동군 옥종면의 경계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산청 사람은 중태재라고 하고, 하동 사람은 위태재라고 한단다. 칡넝쿨이 우거져 있어 갈치재[葛峙(갈치)]라고도 한다.

중태재에서 하산하는 모습.jpg <중태재를 지나 쌓인 낙엽을 밟으며 하산하는 모습>

중태재를 지나면서부터 가파른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낙엽에 덮인 산길을 따라 일렬종대의 대열을 이루어 하산했다. 내려가는 길 좌우의 대나무는 터널을 이룰 정도로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다. 비어 있기 때문에 속을 채우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성장에만 에너지를 쓸 수 있어서 하루에 1m 이상 자랄 수도 있으며, 속이 비어 있기 때문에 강풍에도 꺾이지 않고 유연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올곧음의 이면에 있는 상호 연대의 소중함과 비움의 이면에 있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미덕을 옛 선비들은 대나무로부터 본받으려고 했다.

그런 대나무도 산불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어떤 대나무는 푸름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많은 대나무들은 산불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회색으로 병들어 있었다. 화마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스러져가는 대나무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했다.

회색의 대나무.jpg <곧음과 청정함을 뽐내야 하는 대나무가 화마에 속절없이 회색으로 탈색되었다>

대나무 숲을 통과하자 ‘중택지’라는 저수지가 물을 가득 품고 있었다. 저수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아랫마을은 벼농사 지역임이 예상되었다. 예상대로 저수지 아래에는 제법 큰 논이 있었다. 산청군 시천면 중태마을이 감농사 위주였다면 중태재를 넘어 하동군 옥종면 위태마을에서는 벼농사가 중심인 듯했다. 위태(葦台)마을은 갈대가 무성한 평탄한 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계곡 주변에 갈대나 물풀이 많았던 자연환경이 지명에 반영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둘레길 9구간 종점이자 10구간 시점 근처에도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 둑 아래로 한 무더기의 갈대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위태(葦台)’라는 지명에 맞게 일부러 갈대를 심은 것처럼 보였다. 저수지 옆 도로변에 9구간 종점이자 10구간 시점이라는 조그만 표지판이 있었다. 9.7km라는 표준 거리와 좀 다르게 11km를 걸었다. 4시간이 걸려 종점에 도착하니 타고 온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화개장터로 이동해 ‘이시마표고버섯밥’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이시마표고버섯은 버섯의 갓 표면이 하얗게 갈라져 마치 꽃이나 돌 위에 핀 문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리산의 추운 겨울바람을 견딘 버섯이기에 쫄깃한 식감을 주어 ‘산에서 나는 고기’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인기가 있는 메뉴가 바로 이시마표고버섯밥이란다. 이른 저녁이었으나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워냈다.

이시마표고버섯밥(표대장).jpg <이시마표고버섯집에서 표고버섯솥밥에 재첩국을 곁들여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섬진강을 따라 형성된 섬진강 대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바라본 섬진강은 제법 강다운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때로는 넓은 강폭을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드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섬진강은 석양의 노을을 받아내고 있었다. 섬진강을 젖줄 삼아 살아가는 작은 마을들을 가슴에 담고 부산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19시 50분이었다. 만보기에 26,800보가 찍혔다.

좋은 길 안내해 준 산행 대장과 걷기의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한 일행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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