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구간 수철~성심원, 2026.02.22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자 그렇게도 맹위를 떨치던 겨울이 슬그머니 봄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지리산 둘레길 6구간(수철~성심원)에서 봄소식을 좀 더 가까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집을 나섰다. 동래역에서 9시에 출발하여 6구간 시점인 ‘수철마을(산청군 금서면 수철리)’에 11시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봄기운이 훅하고 얼굴에 스쳤다. 겨울은 완전히 물러간 듯 보였다.
수철마을회관 앞에 ‘모이면 즐거운 정자’라는 뜻의 ‘회락정(會樂亭)’이 서 있었다. 누구든 모여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의 생활형 정자였다. 정자 옆에는 세 그루의 당산나무가 이 마을 사람들과 이 마을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안녕을 빌고 있는 듯 보였다. 당산나무의 응원을 받으며 일행은 단체 사진을 찍고 봄이 가득한 둘레길 6구간 길에 올랐다.
수철마을은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鐵店)이 있어서 ‘무쇠점’이라 했는데, 한자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수철리(水鐵里)’로 되었다. 무쇠의 ‘무’는 ‘물’과는 무관한데 어떻게 ‘무쇠’가 ‘수철(水鐵)’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물이 늘 괴어 있는 논을 ‘무논’이라고 하는데, 이때 ‘무’는 ‘물’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무쇠’를 ‘물+쇠’의 구조로 보고 ‘수철(水鐵)’이라 명명한 듯하다.
질 좋은 철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담금질에 필요한 차가운 물과 숯을 만들 나무가 필수적인데 지리산의 깊은 계곡물과 울창한 숲이 있던 이곳이 철 제품을 만들 최적지였던 모양이다. 그런 마을이 ‘우리마을 도랑살리기 모범마을 1호’로 선정되어, 철제품 생산을 뒤로하고 물고기와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마을로 거듭 났다. 물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수철(水鐵)이란 지명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수철마을을 벗어나자 논둑길이 이어진다. 짧은 논둑길이었지만 둘레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이었다. 일행은 논둑에 일렬횡대로 서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산행 대장인 표대장의 사진 솜씨는 사진작가 수준이다. 논둑길을 지나고 들길을 지나니 지막마을이 일행을 반긴다.
지막(紙幕)마을은 예전에 닥종이(한지)를 생산하던 막사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한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닥나무와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하는데 이 마을이 한지 생산의 최적지였다. 어릴 적 팽이치기할 때, 닥나무 껍질을 나무막대기 끝에 묶어 팽이채로 사용하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닥나무 껍질 팽이채가 헝겊 팽이채보다 질겼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질긴 닥나무 껍질로 한지를 만드니 한지의 수명이 긴 것은 당연하다.
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닥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마솥에 넣고 쪄 껍질이 잘 벗겨지게 한다. 찐 닥나무에서 가장 바깥쪽의 거친 부분인 흑피와 중간 부분인 청피를 긁어내고 가장 안쪽의 하얀 부분인 백피를 잿물에 넣고 삶아 부드럽게 한다. 삶은 백피를 맑은 물에 담가 햇볕으로 표백한 후, 돌판 위에 올리고 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섬유를 잘게 부순다. 잘 풀린 섬유를 물통에 넣고 닥풀을 물에 넣어 닥나무 섬유와 잘 섞는다. 대나무 발을 이용해 물속의 섬유를 얇고 평평하게 건져 올린다. 한 장씩 뜬 종이를 쌓아 무거운 돌로 눌러 물기를 빼고 건조판에 붙여 말린다. 말린 종이 여러 장을 포개 두들겨 반드럽게 하는 도침 과정을 거치면 한지가 완성된다.
한지(韓紙)는 천 년을 가고 A4용지는 백 년을 간다는 말이 있다. 종이 한 장을 만드는 데 이런 정성이 들어가니 종이 자체도 천 년을 갈 뿐만 아니라 한지 위에서 탄생한 수많은 예술 작품 또한 천년의 향기를 머금은 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을 포함한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고미술품이나 고서들을 복원할 재료로 한지를 찾고 있다고 하니 한지는 가히 K-Paper라 할 만하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막마을의 한지 생산은 멈추었다. 닥나무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닥나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필봉산(筆峰山)’이라 명명된 지막마을의 뒷산은 한지 생산이 멈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머금은 듯 보였다. 한지라는 짝을 잃은 필봉산은 우리 일행을 따뜻하게 배웅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지막마을을 지난 길은 평촌(坪村)마을로 이어졌다. 평평한 곳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과는 다르게 산자락에 인접한 마을이었지만 마을 앞에는 산업단지를 조성한 듯 굉장히 넓고 평평한 부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평촌마을 앞으로 금서천(今西川)이 흐르는데 도랑 규모의 개울을 하천 규모로 확장하면서 바닥에는 넓고 평평한 돌을 깔아 홍수에 대비하면서도 자연적 아름다움을 살려 길손에게 실용적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평촌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왼쪽으로 ‘한국항공우주산업 산청공장’을 비롯하여 금서농공단지가 광범위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저 공장에서는 어떤 부품들이, 어떤 제품들이 생산되는지, 그 부품과 제품이 우리 삶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길은 경사가 완만한 굴국이 있는 시멘트 포장의 농로다. 길은 대장마을로 이어진다.
대장(代狀)마을은 신라 때 어느 대장(代將)이 쉬어 간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란 설도 있고, 넓은 터[大場]에 들어선 마을이란 설도 있고, 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란 설도 있다. 한자 표기가 확인되지 않아 특정하기가 어렵다.
대장교를 건너에 있는 마을이 매촌리라고 마실 나온 어르신이 이야기한다. 대장교를 건너는 것으로 대장마을을 지났다. 머리 위로 나 있는 통영대전고속도로에는 쉴 새 없이 차들이 쌩쌩 달린다. 고속도로는 경호강을 ‘경호강2교’라 명명된 교각으로 지나간다. 수철마을부터 함께 걸어온 금서천은 경호강과 만나면서 자신의 이름을 잃고 경호강이 되고 만다. 경호강(鏡湖江)은 남강(南江)이란 공식 명칭이 있으나 이곳 산청에서는 경호강으로 불린다.
경호강은 지리산의 정기를 안고 산청군을 관통하는 물줄기다. ‘거울처럼 맑아 마치 호수 같다’는 뜻을 가진 경호강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벗 삼아 걷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호강을 따라 조성된 친환경로를 따라 걷다가 산음마을을 지나 경호1교를 건넜다.
경호1교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날개를 편 두 마리의 학이 한 곳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의 정자가 보인다. 환아정(換鵞亭)이다. 고사에 의하면 환아정은 ‘거위와 바꾼 정자’라는 뜻으로, 중국 동진의 관리이자 서예가인 왕희지와 관련 있다.
4세기 중국의 동진 시대 어떤 사람이 중국의 경호강가에 정자를 짓고 나서 명필인 왕희지(王羲之)에게 거위를 선물하면서 정자 이름을 짓고 써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왕희지가 거위와 바꾼 정자의 의미로 ‘환아정(換鵞亭)’이라고 써주고 선물로 받은 거위는 곧 경호강 물에 띄워 보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환아정은 진주 촉석루, 영남 밀양루와 함께 영남 3대 누각으로 손꼽힐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정자(亭子)는 경치가 좋은 곳에 놀거나 쉬기 위하여 지은 집이라고 국어사전에 규정되어 있지만, 조선 시대의 정자와 지금의 정자는 지어진 목적부터가 다르다. 조선 시대의 정자는 선비들의 정신적 수양처이자 학문의 장소였다. 시를 짓고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는 지적인 공간이었으며, 때로는 은둔하며 지조를 지키는 곳이기도 했다. 지금의 정자는 등산객이 땀을 식히거나 마을 사람들이 모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회적 편의 시설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절벽 위나 계곡 옆 등 경치가 좋은 곳에 정자를 세워, 자연의 풍경을 잠시 빌려온다는 개념을 정자 건축의 요체로 삼았다. 지금의 정자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 공원 등 이용하기 편리한 곳에 세워 접근성과 편의성의 개념을 정자 건축의 근간으로 삼는다. 지리산 둘레길에도 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정자를 많이 지어 놓았다. 경호강변에 있다고 ‘강변정’이라 이름을 지은 정자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었다. 시장기에 더해 어울려 먹으니 점심 도시락 맛이 배가된다.
점심을 먹고 경호강변을 따라 한낮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걷는다. 완연한 봄이다. 봄의 생명력을 생각하며 걷는 사이 눈부신 모습의 산청고등학교가 좀 봐 달라는 듯 서 있었다. 학교는 지리산을 닮아서인지 넓은 공간에 우람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으로 경호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 앞에는 면학정(勉學亭)이라는 정자가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돋우는 듯싶었다. 이렇게 큰 학교에 학년별 학생 수가 몇 명이지, 교사는 몇 명인지 등에 관한 정보가 궁금했다. 이런 기본적인 정보는 공시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네이버를 통해서도 이런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늘 지나다녔을 꽃봉산로34번길을 따라 걷다가 경호강을 건너기 위해 내리교(內里橋)라 명명된 다리 위에 올랐다. 내리교에서 바라본 경호강은 수량은 부족했지만 바닥이 훤히 보일 만큼 물이 맑았다. 수면에 비친 산그림자와 함께 저 멀리 붓끝처럼 뾰족한 필봉산도 손에 잡힐 듯 보였다.
경호강은 물살이 빠르고 급류가 적당히 있어 동강과 함께 래프팅 명소로 꼽힌다. 예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래프팅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강물의 흐름처럼 세월도 그렇게 쉬지 않고 흘러버렸다. 겨울이라 수량이 부족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수량이 풍부해지면 래프팅을 즐기기 위해 모여든 많은 사람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경호강을 가득 메울 것이다.
내리교를 건너자 산행 대장은 ‘수선사(修禪寺)’로 일행을 안내했다. 수선사 탐방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지만 볼거리가 많다고 산행대장이 추천해 가게 되었다. 수선사는 웅석봉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 가람배치를 따르지 않은 파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찰 초입 절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카페가 있었고, ‘시절人蓮’이라는 문(門)이 절문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은 모든 일은 때가 되어야 이루어짐을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그 인연(因緣)을 사람 연꽃의 ‘인연(人蓮)’으로 바꾸어 놓아, 어떤 환경에서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사람도 어떤 환경에서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때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적절한 때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일행 중 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수선사는 어느 스님이 수십 년 동안 직접 일군 사찰이라고 한다. 원래 논이었던 자리를 더 파고 물을 채워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고, 연못 위를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를 설치했다고 한다. 그 길을 걸으면서 연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길 바라는 뜻이 수선사라는 사찰을 꾸민 스님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선사에서 다시 경호강 내리교로 내려왔다. 내리교에서 한밭마을로 가는 가까운 길과 선녀탕으로 가는 먼 길로 나뉜다. 산행 대장은 우리를 먼 길로 인도한다. 길은 지성마을로 이어지고, 지성마을은 지곡마을로 이어졌다. 길은 ‘길다’라는 단어와 연관된 듯, 좁아졌다가 넓어지고 갈라졌다가 이어지면서 끝이 어딘지 모르게 이어져 있었다.
‘지혜로운 성’을 뜻하는 ‘지성(智城)마을’과 ‘지혜로운 마을’을 뜻하는 ‘지곡(智谷)마을’은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삶의 터전을 일구고 지혜롭게 거주했던 삶의 역사가 담긴 지명인 듯하다. 지성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있어 지리산의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농촌의 일상을 체험하면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지곡마을을 지나 포장도로를 조금 올라가니 제법 넓고 깊은 ‘내리저수지’가 봄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일행을 맞이한다. 저수지 둑에 설치된 ‘지리산둘레길’이란 표지판 앞에서 사진들을 찍고 저수지 둑을 지나 산길을 오른다. 길 좌우의 앙상한 겨울나무들은 지금쯤 새잎을 틔우기 위해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 사이에 선녀탕에 도착했다.
선녀탕은 계곡에 넓은 웅덩이가 형성된 곳으로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물이 맑은 곳으로, 한국의 명수 100선에 선정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웅덩이에 고인 물에 선녀 대신 낙엽이 둥둥 떠 목욕하고 있었다. 선녀탕 위쪽에 있는 강신등폭포는 얼음이 얼어 빙벽을 이루고 있었고 선녀탕 좌우의 소나무만이 선녀탕의 부족함을 겨울 청정함으로 달래주고 있었다.
선녀탕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이지만 길 폭이 넉넉하고 평탄해 걷기에 좋았다. 길옆에 고로쇠나무들이 도열해 있었는데 고로쇠나무에 굵은 주사바늘을 꽂아 투명 호스에 연결하여 수액을 채취하고 있었다. 호스를 이용해 어느 한곳의 집수탱크로 모으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고로쇠 수액은 나무가 봄을 준비하며 뿌리에서 끌어올리는 영양분인데, 사람의 몸에 좋다는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채취하고 있었다. 고로쇠 수액이 농촌 살림에 보탬이 된다고 하니 나무에 해를 끼치지 않은 범위에서 채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로쇠나무의 행렬이 끝나자 대나무가 도열하여 일행을 맞이한다. 약한 바람에도 대나무 잎사귀는 서걱이며 청정함을 뽐내고 있었다.
대나무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사이 ‘바람재’에 도착했다. 바람재는 내리교에서 한밭마을과 선녀탕 방향으로 갈라졌던 길이 다시 합쳐지는 곳이다. 고개를 오르기 쉽도록 산청의 너른 들녘을 지나온 바람이 등을 밀어준다고 해서 바람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고, 오르막을 오르느라 맺힌 땀을 산바람이 씻어준다고 바람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바람재를 지나면서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잘 정비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니 경호강과 통영대전고속도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속도로 뒤로 연무(煙霧)가 산봉우리를 삼킬 듯 점령하고 있었다. 함양군 마천면 산불의 연무가 지리산과 웅석봉을 넘어 이곳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불씨 관리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달라는 안전 안내 문자를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가슴으로 손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를 느꼈다.
연무에 휩싸인 하늘을 보며 걷는 사이에 성심원(聖心園)이 눈앞에 보인다. 성심원은 가톨릭 재단법인 프란치스코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과 치료를 위해 세운 요양시설이다. 성심원은 성스러운 마음이란 뜻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안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 의지가 반영된 명명이다.
과거 이곳의 환우들은 양돈, 양계 및 농사를 지으면서 자활했으나, 현재 성심원에 사는 사람은 대다수 80대 노인들로 모두 완치된 상태라고 한다. 이들은 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편견과 박해와 냉대 속에서 육지 속의 섬에 죄인처럼 갇혀 살아야 했다.
지리산 둘레길 6구간 종점이자 7구간 시점에 표지판이 있는 성심원 입구에 도착했다. 19km, 5시간 20분이 걸렸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의보감촌 오리하우스로 이동해 저녁을 먹었다. 맛도 양도 푸짐했다. 집에 도착하니 20시 30분이었다. 만보기에 36,000보가 찍혔다.
좋은 길 안내해 준 산행 대장과 좋은 길 함께 한 일행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