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기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저술을 정리한 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답연아(答淵兒)’를 보겠습니다. 다산(茶山)의 아들 학연(學淵)은 유배 중인 다산에게 아버지를 모함한 사람들에게 먼저 사죄해서라도 유배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편지를 합니다. 이 편지에 대한 답이 ‘답연아’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내준 편지는 자세히 보았다. 천하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하나는 시비(是非)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利害)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축이 서로 만나 네 종류의 등급이 생겨난다. 첫째, 옳고 이로운 시이리(是而利), 둘째, 옳은데 손해인 시이해(是而害), 셋째, 그른데 이로운 비이리(非而利), 넷째, 그르고 손해인 비이해(非而害)이다. 모함한 사람들에게 먼저 사죄하는 것은 이익을 보기 위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으로 셋째에 해당한다. 이는 곧 넷째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겠느냐. (중략) 나는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다하였다. 사람이 닦아야 할 도리를 이미 다 했는데도 돌아가지 못한다면 천명(天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다산은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 길이 평생 유배지에 남아 있는 길일지라도 천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죠. 돈만 벌 수 있다면, 좋은 대학만 갈 수 있다면, 남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면 수단쯤이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이 한 번쯤 곱씹어 볼 만한 논리가 아니겠는지요. 사람의 행위를 시비의 축과 이해의 축으로 나누고 그 축의 교차점의 상하좌우를 네 등급으로 설정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 다산은 인격적으로도 추앙받아 마땅한 인물입니다.
‘은혜 갚은 까치’라는 전래 동화가 있죠. 구비 전승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버전이 있습니다. 옛날 어느 선비가 길을 가던 중 까치의 다급한 울음소리를 듣게 됩니다. 살펴보니 큰 구렁이가 까치둥지 안의 까치 새끼들을 잡아먹으려 하는 것입니다. 선비는 활을 쏘아 구렁이를 죽입니다. 날이 저물어 선비는 불빛을 찾아 하룻밤 묵게 됩니다. 잠결에 목이 갑갑하여 눈을 뜨니 구렁이가 선비의 몸을 감고서 선비에게 말을 합니다. 자기는 낮에 선비의 활에 맞아 죽은 구렁이의 아내인데 남편의 원수를 갚겠다는 겁니다. 해가 뜰 때까지 뒷산 절의 종이 세 번 울리지 않으면 잡아먹겠다고 합니다. 이때 종소리가 세 번 울립니다. 구렁이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선비가 종각으로 가 보았더니 까치 세 마리가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겠습니다. 구렁이가 까치를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까치를 선(善)으로 구렁이를 악(惡)으로 볼 수 있지요. 구렁이를 쏘아 죽인 것은 악을 징치한 것이니까 선비의 행위는 선행입니다. 착한 선비를 나쁜 구렁이가 잡아먹으려고 하니까 까치가 목숨을 바쳐 도와주죠. 은혜를 갚은 셈입니다. 까치의 보은도 선행입니다. 그래서 이 동화의 주제를 ‘은혜를 갚자’, ‘선행을 하자’로 하면 간단합니다. 그러나 구렁이의 입장에서 보면 간단하지 않습니다.
구렁이가 까치를 잡아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죠. 구렁이의 행위를 악으로 본다면 까치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도 악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눈에 보인다고 악으로 규정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선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목숨으로 은혜를 갚은 까치의 행위도 선행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새끼 까치들은 뱀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날지 못합니다. 먹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부모 까치가 죽으면 새끼 까치는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결국은 새끼들의 목숨마저 버리는 것이 선행이겠는지요. 아이들에게 이런 선행을 본받으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이번에는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이 동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동화에서 이익을 얻는 대상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렁이도 억울하게 죽었고, 부모 까치도 은혜를 갚기 위해 죽었으며, 새끼 까치도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선비도 죽을 고비를 넘기는 손해를 맛본 뒤 가던 길을 갈 수 있게 되었지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손해입니다. 만약 선비가 구렁이를 쏘지 않았다면 까치 새끼는 손해를 봤겠지만, 구렁이는 이익을 얻었겠지요. 부모 까치와 선비는 새끼 까치를 살리지 못했다는 무형의 손해가 가슴에 남아 있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선비가 구렁이를 쏘지 않는 것이 이익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 왜 선비는 구렁이를 쏘았을까요? 이를 시비(是非)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겠습니다. 까치의 다급한 울음소리를 듣고 선비는 이해나 선악을 따지지 않고 활을 들어 쏩니다. 그것이 옳은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과연 옳은 행위일까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이겠는지요?
맹자(孟子)는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사람이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는 것은 팔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진 것이기에 본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맹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구나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어린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는 것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라며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어린아이의 부모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측은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수오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사양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是非之心(시비지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端)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람이 이 네 가지 단서[四端]를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사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
선비는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활을 쏜 것입니다. 부모 까치와 친분을 맺기 위해서도 아니고, 동료 선비로부터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까치의 울음소리가 싫어서도 아닙니다. 새끼 까치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선악과 이해를 떠나 내면 깊숙하게 자리한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이죠. 사람이면 당연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기에 선비의 활쏘기는 맹자의 관점에서 옳은 행위로 볼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