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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와 사랑

사랑은 예측 가능성을 주는 것.

by 무니

매우 조용한 집에서 자그마한 주전자에 물이 보글보글 끓는 것을 소설로 쓴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소녀는 별다른 감정적 움직임들이 없다. 1인칭 소설임에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면서도 격한 기쁨, 격한 슬픔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감정이 조그맣게 보글보글 끓는 것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조용한 집에서 자그마한 소리를 내면서 끓는 주전자 속 물과 같은 느낌? 그런 소녀의 감정을 끓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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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셀라 부부가 소녀에게 해준 것들이 엄청나게 특별한 희생과 사랑이 있는 것들은 아니다.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말을 걸어주고, 칭찬을 해주고, 실수를 해도 민망하지 않게 해주며, 예쁜 옷을 사 입히고,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주고,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 그냥 보통의 가정에서 해줄 수 있는 것,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소녀의 부모는 그런 것들을 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학대를 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 앞에서 소녀가 민망해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소녀의 짐을 내려주는 걸 세심하게 챙기지도 않으며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법이 없다. 소녀가 아빠에 대해 하는 이야기라곤 내기에서 져서 소를 잃은 이야기 따위밖에 없다. 이런 게 너무 익숙한 소녀에게 킨셀라 부부는 너무 밝다. 너무 햇빛이 강렬해서 눈이 멀 것 같다. 소녀는 그 햇빛이 사라지면 좋겠다. 구름이 껴서 앞이 보이면 좋겠다고 한다. (p.53)


소녀는 뭘 보고 싶어한 걸까? 강렬한 햇빛때문에 소녀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소녀가 다시 학교를 가야해서 집에 돌아가야 할 때, 킨셀라 아주머니는 “너도 알고 있었잖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돌아가는 게 결정된 소녀는 오늘 밤 당장 가겠다고 이야기한다. 아마 이 부분도 구름이 껴서 앞이 보이면 좋겠다는 말과 연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소녀가 제대로 보고 싶다고 한 것은 자신의 현실이 아닐까 싶다. 킨셀라 부부의 집은 너무도 따뜻하고 눈이 부셔서 나의 현실과 괴리된 환상적인 공간이라 여기에 빠져 내 현실의 공간을 잊어버릴까봐 소녀는 두려웠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찾아보니 심리학에선 “행복에 대한 혐오”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행복한 감정이 두렵고 세상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할 것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행복해지는 것 같으면 스스로를 경계한다고 한다.


이 소녀의 행복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주변의 힘든 아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학교중에서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보면 세상 즐거워보이고 행복해보이지만 행복하냐는 질문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아이는 극히 드물었다. 즐겁게 웃으면서도 행복하다고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차피 이건 잠깐이라는 걸 알고 있는듯이. 한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애인의 애인에게>라는 책에서 “결혼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 주는 일이야”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만 그러겠나. 결혼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안정감이라는 것은 예측 가능성에서 나온다. 이 소녀에게도 우리 주변의 힘든 아이들에게는 삶의 예측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닐까.


매일 매일 루바브를 뽑고 타르트를 만들고 페인트칠을 하고 침구를 꺼내고 거미줄을 걷고 빨래를 하고 스콘을 만들고 욕조를 닦고 계단을 쓸고 가구에 광을 내고 양파로 소스를 만들고 소스를 냉동고에 넣고 꽃밭에서 잡초를 뽑고 해가 지면 물을 주고 저녁 식사를 하고 아홉 시 뉴스를 보고 일기예보가 끝나면 이제 자라는 말을 듣는 것.(P.46)


이렇게 반복되는 예측 가능성이 소녀에게 안정감을 주고 사랑과 행복을 주었다. 하지만 이 예측이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소녀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이 눈부신 햇빛이 좋지만, 내가 돌아가야할 현실이 저 햇빛 뒤에 있으리라고, 저 구름이 곧 와서 이 햇빛을 가릴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이 행복감이 이어지리라는 ‘예측 가능성’이 없었으니까 소녀는 끝내 거기서도 마냥 행복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행복이 두렵고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마지막에 집을 벗어나 킨셀라 부부에게 달려가 아저씨에게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소녀의 몸짓을 발견하기도 했다. 보글보글 끓던 주전자에서 삐라는 강렬한 소리가 나듯이. 이제 소녀는 행복에 대한 혐오와 공포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찾아나서려는 힘을 얻게 된 것처럼 보인다. 햇빛이 아무리 눈부셔도 그것을 바라보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킨셀라 부부는 정말 위대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이 들었다. 난 킨셀라 부부처럼 누군가에게, 학교의 힘든 아이들에게, 나의 가족에게 예측 가능성을 주고 행복을 찾는 힘을 주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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