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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은 왜 고전이 되었나

징징거리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꾸역꾸역 읽고 나서

by 무니

경계인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말로 어떤 집단에도 속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 문학에서 경계인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이다. 수능에도 2번이나 출제될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이상이 없다고 느낀 주인공이 계속 중립국으로 보내달라고 주장하는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홀든과 이명준은 경계인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닮아 있다. 이명준은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다. 홀든 역시 청소년으로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중간자적인 존재다. 동시에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도 속하지 못하고, 학교밖 어른들에게도 아이 취급을 받는 애매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경계 속에서 홀든은 아이의 순수함을 동경하고 어른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면서도 자신 역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어른처럼 행세하려고 한다. 이렇게 홀든은 이명준처럼 자기 자신이 어디에 속한 인물인지 모른 채 이명준처럼 혼란을 겪는다. 그래서 이명준이 중립국을 외쳤던 것처럼 외딴 숲에서 오두막을 짓고 사람들과 경계를 친 채 살아가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명준이 중립국을 마치 이상처럼 여겼던 것처럼, 오두막을 자신의 이상으로 여겼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은 경계인으로서의 홀든의 감정으로만 가득차 있다. 홀든은 자신은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을 동경한다. 홀든이 그나마 사랑하는 인물들은 순수함과 인간에 대한 친절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홀든은 아이의 순수함에 엄청나게 집착한다. 동생 앨리가 죽었을 때 분노하고 자책하며, 동생 피비의 학교 벽에 적힌 ‘Fuck you’라는 낙서에 화를 내고 지우려고 한다. 길거리에서, 박물관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피비에게 빌린 6달러는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홀든 주변엔 순수함과 거리가 먼 위선과 가식만 가득하다. 우아’, ‘토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쓰레기같다’, ‘역겹다’ 등 청소년 홀든은 어른들의 위선과 가식에 학을 뗀다. 흉측한 몰골로 그럴듯한 조언(잔소리일지도…)을 하는 꼰대 스펜서 선생님, 이성이 많지만 육체적 관계에만 몰두하고 정작 상대의 이름에는 관심조차 없는 스트래들레이터 등 홀든의 세상에는 역겨운 인물들만 가득하다. 학교 밖에서도 가식 덩어리 배우들과 노래 못하는 가수나 연주자들, 인간 관계에는 무관심하고 돈만 밝히는 속물들 투성이다. 이런 인물들을 바라보면 독자들도 인간 혐오에 걸릴 지경이다.(그래서 너무 읽기 힘들고 불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경계인으로서 어른들의 삶에 계속 다가간다.. 일부러 술집에 들어가고 담배를 피우며 어른 행세를 하며 매춘을 하겠냐는 모리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기도 한다. 어른들을 혐오하면서도 어른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홀든은 자기 혐오로 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모습이나 자신이 웃는 모습을 혐오한다. 이렇게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차는 자신의 모습을 알기에 피비가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할 때 학을 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되돌아갈 수 없는 아이들의 순수함을 동경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반대로 걷는 것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이렇게 자기 혐오와 아이러니에 빠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홀든은 이런 인간들을 혐오하면서도 끊임없이 이들에게 다가간다. 친구들을 쓰레기 취급하면서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싶어 하고 애클리를 찌질하다고 생각하면서 애클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폭행한 스트래들레이터와 모리스를 보고 싶다고까지 한다. 이 단계까지 오면 찌질하고 잘난 척 하는 홀든에게 연민이 들 수밖에 없다. 순수함의 파수꾼을 자처한 홀든이 순수한 피비에게 위로받고 울음이 터졌을 때 그 연민의 감정은 가장 크게 부풀어오른다.


이 감정이 느껴졌을 때 이 소설이 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들 중 하나로 여겨지는지 알 수 있다. 왜냐면 이 연민은 우리에게 가지는 연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 바치는 연민이다. 모두 과거의 청소년이기도 했거니와 우린 모두 지금도 경계인이다. 학생을 벗어나 신규 교사가 되고, 미혼에서 기혼이 되고, 나만 존재하던 세상에 아이가 껴들어서 아저씨와 아빠 사이를 헤메는 나처럼. 미래에도 난(우리는) 어느 집단 사이의 경계에서 이리저리 흔들릴 것이다. 그렇게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피비를 찾아대고, 붉은 머리의 앨리를 떠올리는 빨간 사냥모자를 놓지 않는 홀든처럼 끊임없이 나를 위로할 존재들을 붙잡고자(Holden)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로의 존재들은 서로에게 순수하게 다가가는 인간들일 것이다. 순수함을 지켜주겠다고, 파수꾼이 되겠다던 홀든이 결국 순수함에 의해서 구원받는 모습을 보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인간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서로에 대한 순수함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순수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아이들, 친절함으로 어떤 가식도 없이 순수하게 대하는 수녀들이 홀든에게 위안을 주었듯이 광장의 이명준이 자신을 순수하게 사랑해준 은혜에게 위로를 얻었듯이 인간이 인간에게 위선과 가식없이 대할 때 경계인으로서 항상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인간들이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보면 Catcher는 순수함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아니라 위선과 가식 없는 순수한 인간 관계를 붙잡고 싶은 Catcher가 아닐까?



위의 내용과 별개로 소설을 다 읽고 예전 내 모습이 많이 떠올랐다. 어릴 때 누가 나에게 왜 교사가 되고 싶냐고 물었었다.(학교 친구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때 내 대답이 “어른들 말고 아이들이랑 있고 싶어서”였다.



“우아. 정말로 홀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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