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무엇인가?
영화 <변호인>을 처음 봤다. 개봉한지도 꽤 되었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일화를 다룬 이야기라해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음에도 미루다가 이제야 보게 되었다. 임시완과 송강호 연기력도 인상 깊었고 무엇보다 영화 보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송강호가 법정 재판에서 국가에 대해 외치는 부분이 왜 유명한가에 대해 느끼게 했다. 누구나 아는 장면이겠지만, 이해를 돕고자 해당 장면에 대한 설명을 적어둔다.
(해당 영화에 대한 설명은 영화 속 사건의 내용을 다룸을 알립니다.)
부산의 야간 독서 모임이 국가 전복을 위한 공산주의 혁명을 꾀했다는 혐의로 독서 모임의 청년들이 잡혀들어갔다. 정권의 정당성 유지를 위해 경찰들이 조작 수사를 한 것. 이러한 이들의 자백을 유도하기 위해 경찰들은 모진 고문을 했고 법정에서도 판사, 검사는 모두 고문의 흔적을 무시한다. 이들을 변호하는 건 주인공 송우석 변호사. 송우석 변호사는 법정 중 고문 경찰 차동영과 논쟁을 벌인다.
송우석: 학생이 책 읽고 토론한 게 국보법(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증인은 뭘 보고 판단했습니까?
차동영: 내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국가가 판단합니다.
송우석: 국가? 증인이 말하는 국가가 대체 뭡니까?
차동영: 변호사란 사람이 국가가 뭔지도 몰라?
송우석: 압니다. 너무 잘 알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그런데 증인이야말로 그 국가를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국가보안문제라고 탄압하고 짓밟았잖소!
이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인 이유는 송우석 변호사의 저 대사가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을 몇 줄의 대사로 모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영화는 국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애국이란 무엇인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애국이란 가치는 거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가깝다. 우리 조상들이 일제로부터 탈환하고 6.25로 부터 지켜낸 이 국가의 가치는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며 애초에 이걸로 논쟁을 하려 하지도 않는다. 국사 시간에 열심히 배운 우리나라의 위대함도 그에 대해 한 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애국은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영화에서 차동영은 자신과 같은 애국자 덕분에 국민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애국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차동영이 생각한 애국은 무엇일까? 난 차동영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정권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소름돋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 일들이 매우 옳은 일이라고 믿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란 말도 있지 않나? 차동영은 자신의 고문 행위가 진정 나라를 위한 일임을 믿었던 것이다. 본인은 아마 죽을 때까지 본인이 애국자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국가라는 존재는 추상적인 존재이고 사람들마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게 느껴진다. 누군가는 공산주의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누군가는 현재 국가를 다스리는 정권을, 혹은 누군가는 한민족을, 혹은 누군가는 한반도 땅을 국가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머리 속에 국가를 머릿 속에 담고 그것을 사랑하는 행위를 애국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 사람들도 대한민국이라는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여전히 교실 앞 가장 높은 위치에는 태극기가 달려 있다. 국가 행사에는 여전히 국기에 대한 맹세 행사를 한다. 장엄한 음악을 들으며 태극기를 향해 사람들은 심장에 오른손을 올린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지금의 사람들이 위의 맹세를 속으로 읊조리며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국가는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사실 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면서도 내가 무엇에 대해 맹세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서 난 무슨 일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니,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실 난 국가라는 말이 아직도 흐릿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우식 변호사의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말이 인상 깊은 이유는 적어도 여기서의 국가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오래되어 기억이 안 나는데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피를 흘릴 수 있는 대상을 위해 살라는 뭐 그런 이야기였는데 난 이 말이 송우식 변호사의 말과 딱 어울린다 생각한다.
흐릿하고 모호한 대상에 무조건적인 충성은 위험하다. 그 모호한 것에 자신의 이익이나 욕심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속아 그것을 믿어버리는 순간 우린 그 이익과 욕심을 지키는 파수병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것이 옳다고 믿어버린채, 누군가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마크 트웨인은 애국자의 정의를 자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른채 가장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모든 애국자들을 이렇게 매도할 순 없겠으나 적어도 차동영은 이 말에 해당했다고 믿는다.
물론 국민이라는 말도 추상적이지만, 적어도 송우식 변호사에게 국민은 앞에서 고문으로 피흘린 청년들이었기에 난 송우식 변호사의 말이 마음에 든다. 난 우리가 각자 헌신하고자 하는 대상이 피를 흘릴 수 있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속아 국가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 말에 휘둘리지 말자.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피를 흘릴 수 있는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하지 말자.
"애국심은 언제나 폭군의 도구였다.(제임스 메디슨)"라는 말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