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정권기의 일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행정 능력이 뛰어나 일처리가 물 흐르듯 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던 손변이 경상도안찰부사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몇 년간 처리하지 못한 골치 아픈 소송 사건 하나가 이제는 해결될 것이라며 한껏 기대했다. 유산 상속과 관련된 남매 사이의 분쟁이었다.
남동생은 유산이란 자녀가 함께 상속하는 것인데 누나 혼자만 부모의 재산을 독차지 하고 자신은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니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누나의 입장은 달랐다. 아버지가 임종할 때에 집안의 재산을 모두 자신에게 주셨고 동생에게는 검은 옷과 관, 짚신과 종이를 남기셨는데 상속 문서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려에서 어떤 자녀에게 얼마만큼 상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재산을 물려주는 부모의 의지가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부모들은 대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고 고르게 재산을 분배하였다. 유산을 균분하는 것이 상속의 커다란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산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을 때에 소송 사건이 일어나기 쉬웠다. 남매의 소송 사건이 그런 경우였다. 관행으로 보면 균분하는 것이 맞는데, 아버지가 누나에게 유산을 모두 상속하고 동생에겐 엉뚱한 물건들만 남겨 주면서 문서까지 작성해 두었으니 난감한 일이었다.
사건을 이리저리 검토한 손변이 남매를 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어디 계셨느냐?”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때 너희들은 각각 나이가 몇 살이었느냐?”
“누나는 혼인했고 저는 다박머리 어린애였습니다.”
손변의 뇌리에 번뜩이는 깨달음이 생겼다.
“부모 마음은 자식들에게 다 같은데, 어찌 다 자라 혼인까지 한 누나는 후하게 주고 어머니도 없는 어린애는 박하게 주겠느냐? 돌이켜보니 어린애가 의지할 것은 누나뿐인데, 유산을 똑같이 나눠 주면 동생을 아끼지 않거나 제대로 키우지 않을까 염려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애가 자라서 검은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짚신을 신고 종이에 소장을 써서 관청에 청원하면 잘 판결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이것이 이 네 가지 물건만 동생에게 남기신 이유이다.”
동생과 누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펑펑 울었다. 법적으로는 아버지의 유언과 상속 문서가 있어 누나가 유산을 모두 차지해야 했다. 그러나 동생에게 네 가지 물건을 남긴 숨은 뜻이 동생의 양육과 유산의 균분을 기대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낸 명판결이었다. 마침내 누나는 동생에게 유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다.
유산은 골고루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재물 앞에서는 장사 없었다. 인종대 관료인 이지저는 평소 마음가짐이 너그럽고 후하다고 평가를 받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유산의 분배를 놓고는 인색함을 드러내었다. 6남 2녀에 장남이었던 그는 아버지 문하시중 이공수가 사망하자 동생들과 유산을 나누지 않고 혼자 차지하였다. 아버지가 상속 문서를 제대로 작성하고 사망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은퇴하기 전부터 중풍을 앓던 아버지가 말년에 고생 하다가 상속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사망하자 유산을 독차지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이지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상속에서 균분이 반드시 강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강력한 상속 관행이었기 때문에 균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소송으로 번지거나 사회적 비난을 받았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아들과 딸이 번갈아 지내던 사회에서, 어떤 자녀는 재산을 상속받고 다른 자녀는 유산을 받지 못하면 의무의 이행과 권리의 향유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이었다. 고려 사람들이 유산을 균분했던 근본적인 이유에 해당했다.
재산을 균분하면 재산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없어 자녀들이 골고루 생계를 꾸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균분의 상속 방식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재산이 계속 쪼개지는 것이므로 개별 가계의 재산은 계속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료가 되어 봉급을 받거나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늘렸고 축적된 재산을 다시 자녀에게 상속하였다. 그러므로 상속으로 부자가 되기는 부모가 대단한 거부가 아닌 한 어려웠다. 고려에 살림이 넉넉지 않은 가난한 관료들이 많았던 것도 유산을 균분하는 가족적 사회적 관행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거부가 아니면 상속으로 부자를 만들지 않는 나라, 가난해도 생계는 꾸릴 수 있게 하는 나라, 그것이 고려라는 나라였다.
유산을 골고루 상속하지 않았을 때에 형제자매 사이에 소송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으므로 부모들도 신경을 많이 썼다. 윤관의 7대손인 윤선좌는 늙어 작은 병에 걸리자 아들과 딸을 불러 놓고 상속을 했다. “지금 세상에 형제자매들이 서로 불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 재산 싸움 때문이다. 너희들은 다투지 말고 화목하고 자손들도 그렇게 하도록 훈계해야 한다.” 아들 윤찬을 시켜 상속 문서를 작성하고 아들과 딸에게 유산을 고르게 나누어 주었다.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집안의 화목이 유산의 분배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유산을 균분했던 또 다른 이유였다.
나익희는 유산 상속으로 집안의 화목이 깨질까봐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사양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신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무예를 익혔으나 독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젊어서부터 강직하였고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한 모습을 대견하게 생각한 어머니가 유산을 상속하면서 따로 노비 40명을 더 주고자 했다. “아들 하나가 딸 다섯 사이에 있어 어머니께서 저를 사랑하여 더 주시려 하시는 것은 알겠지만 누를 끼치고 싶진 않습니다.” 했다. 어머니도 아들의 뜻을 알고 마음을 접었다.
자식들이 화목하게 살도록 하려면 부모가 유산을 상속할 때에 균분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부모가 유산을 골고루 상속하지 않았거나 상속 문서를 작성하지 못한 채 사망한 경우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고려 말에는 상속 분쟁이 상당히 많이 발생하였다. 노비 소송을 담당한 도관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법령의 제정을 제안했다. 노비 소송이 일어나는 근본 원인은 상속을 받으면서 자녀들이 나누어 갖지 않고 어느 하나가 재산을 모두 독차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노비를 유산으로 상속받은 사람 가운데 형제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 독차지했거나 나누기는 했으나 고르게 나누지 않은 경우는 다른 형제가 고소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유산의 상속에서 균분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송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그동안에도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법령은 그런 경우에 국가가 해결해 준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여 균분을 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균분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기는 집안의 불화와 소송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러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법령이 제안된 것이었다.
고려 사람들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아 유산을 상속할 때에 균분했으나 혈족이 아닌 타인에게 넘어가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아들이나 딸이 없어 양자를 들이려 한다면 먼저 조카나 생질 중에 들여야 했고, 조카나 생질도 없어야 비로소 다른 성씨를 양자로 들일 수 있었다. 이때에도 3세 이전에 버려진 어린 아이를 호적에 등록하여 자기 성씨를 쓰도록 해야 비로소 법적으로 양자로 인정받았다. 혈족이 아닌 타인을 양자로 삼는 것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재산이 그들에게 상속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고려 사람들은 아들과 딸이 없어도 양자를 잘 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 전후기를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충렬왕-충숙왕대 관료인 김사원은 유언을 남기면서 이러한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자손들이 자식이 없다고 대의를 돌보지 않고 제멋대로 다른 성씨의 어린 아이를 들여 양자로 삼고 골육지친은 길거리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처럼 취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재산인 노비를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도 안 된다. 관직을 얻기 위해 노비를 권세가에게 뇌물로 주어서도 안 된다. 이런 자들은 효성스런 자손들이 관청에 고소하여 노비를 빼앗고 호적에서 영원히 끊어 버려라.
(김무노비도허여문기, 세종 11, 1429)
세종대 인물인 김무는 상속 문서를 작성하면서 가문 내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증조인 김사원의 유언을 상기시켰다. 김사원은 다른 성씨의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이거나 골육지친을 남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재산을 다른 성씨에게 상속하거나 뇌물로 바치는 자식들은 호적에서 삭제하라고까지 했다. 그만큼 당시 사람들은 재산이 혈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상속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충숙왕대에 남긴 유언이 세종대까지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에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었는지 보여준다.
고려 말에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노비를 자손 외의 타인에게 상속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령이 정비되었다. 후사가 없는 경우에 부부의 가까운 친척 가운데서 양자를 삼거나 3세 전에 버려진 다른 성씨의 어린 아이를 양자로 들여 호적에 올려 자기 자식처럼 기른 경우에만 상속이 가능하도록 했다. 고려 전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부의 재산이 가능한 한 다른 성씨의 양자에게 상속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은 재산이 가까운 혈족 내에서 분배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부부에게 자손은 물론 양자도 없으면 그들의 재산은 남편의 재산은 남편의 사손이, 아내의 재산은 아내의 사손이 골고루 나누어 가졌다. 사손이란 자녀 없이 죽은 부부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친척으로, 형제, 자매, 조카, 종손, 백숙부, 고모 등을 포함하는 2-4촌 범위 내의 가까운 혈족을 말한다. 자손이나 양자 없이 사망한 부부의 재산은 각각의 사손들이 관청에 신고한 후에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재산은 혈족 외의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고 가문 내에 보존될 수 있었다. 재산을 절대로 타인에게 상속하지 마라. 고려 사람들이 간직한 상속과 관련된 또 다른 좌우명이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경국대전
최재석, 고려조의 상속제와 친족조직, 동방학지 31,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