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나는 가난에 빠져들어, 온 집안이 모두 죽을 먹는다.
진실로 신선은 아니거니, 무슨 연유로 솔잎을 먹겠는가.
인자하다 법사의 마음, 녹봉 하나 없는 나를 불쌍히 여겨,
은혜로이 흰쌀을 보내왔으니, 알알이 참으로 구슬이로다.
어찌 안진경처럼 편지를 쓰랴, 이미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려왔는데.
사방에서 저녁밥을 짓는데, 찬 부엌에도 비로소 연기가 나는구나.
이제야 굴원에게 웃음 짓나니, 쓸쓸히 가을국화 먹고 지냈으니.
(동국이상국집, 권7, 희 선사가 쌀을 보내주므로 붓이 달리듯 시를 써서 사례하다)
시인이자 정치가 이규보(1168-1241)가 먹을 것이 떨어져 희 선사에게 쌀을 빌린 것은, 과거에 급제해 놓고도 몇 년째 관직을 얻지 못해 녹봉 없이 살던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명종을 폐위하며 신종을 즉위시킨 다음 해인 1197년이었다.
관료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시를 짓는 재능이 뛰어나 기동奇童으로 불렸던 그는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에 입학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했으나 글재주만큼 인생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 한달음에 글을 써내려가 좌중을 감탄케 하는 글 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과거 응시용 문장은 별로 연습하지 않은 탓에 예비고시인 국자감시는 네 번 만에 붙었고, 본고시인 예부시에는 동진사로 합격했다. 을과나 병과가 아니라 동진사의 낮은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 성에 차지 않아 합격을 사양하려 했으나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뜻대로 하지 못했다. 23세였다.
불운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관직 숫자는 적고 벼슬을 희망하는 사람은 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출세를 도와줄만한 사람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호부낭중에 올랐던 아버지 이윤수가 죽었고, 그의 글재주를 눈여겨보아 합격의 기쁨을 안겨다 주었던 국자감시 고시관인 유공권과 예부시 시험관인 이지명도 죽었다. 자신을 추천할 만한 인물들에게 몇 차례 시나 편지를 보냈으나 그를 싫어하는 사람까지 있어 나이 30세가 되도록 제대로 된 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다. 혼인도 하고 아이까지 있는데 관직이 없어 녹봉을 받지 못하니 살림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밥이 아니라 죽을 먹는 날도 자주 있었다. 어쩔 도리 없이 가깝게 지내던 선종 승려인 희 선사에게 쌀을 빌렸다. 쌀을 보니 한 톨 한 톨 구슬처럼 소중하고 귀했다. 이제야 자기 부엌에도 밥 짓는 연기가 났다. 고마운 마음에 시를 써서 보냈다.
나는 신선이 아니니 솔잎을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장자가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렸던 것처럼 나도 다행히 희 선사에게 쌀을 빌렸으니 당나라 안진경 같이 쌀을 빌리는 편지를 이제는 쓸 필요가 없다. 나는 쌀을 겨우 구했지만 국화를 먹고 살았다는 굴원을 생각하니 안 됐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난다. 무슨 책이든 한번 읽으면 모두 기억했다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그는 이런저런 고사를 인용하며 소회를 밝혔다.
이규보가 빌려 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 같이 없는 처지에 빌려주기도 했다. 이규보가 중서성에서 숙직하던 날 밤에 젊은 시절 과거 시험에서 함께 합격했던 동년 노씨가 편지를 보내왔다. 고려에서는 과거에 같이 합격한 동년끼리는 관료 생활에서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형제처럼 지냈다. 다음날 정오가 지나 퇴근하려다가 문득 생각나 편지를 열어보았더니 쌀을 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나라 창고가 비어 이규보 자신도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여러 번 궁핍을 겪어 보았기에 편지를 다 읽지 않고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강직한 노씨가 이규보 역시 어려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배고파 우는 어린 새끼들의 울음소리를 차마 더 듣지 못해 쌀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규보는 집에 있는 쌀 약간을 보내면서 너무 적지는 않을까 미안한 마음도 담아 보냈다. 함께 부친 편지에 다음에 한번 만나자고 썼다.
살림이 어려운 가난한 관료들이 많았던 고려시기에는 서로 빌리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하며 살았다. 생필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았고 크게 부끄러운 일로 인식되지도 않았다. 살림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서로 돕고 돕는 인심이 살아 있는 사회였던 것이다.
고려의 관료들은 녹봉을 받으면 그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녹봉이 살림하기에 충분치 않았던 가난한 관료들이 생필품을 충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선물의 수수였다. 사실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화가 아니라 고려인의 일반적인 문화였다.
필요한 물품을 선물로 받으면 그만큼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이규보는 맛있는 배를 선물로 받고는 조각달처럼 잘라 입에 넣으니 머금자마자 얼음처럼 녹아 목에 들어간다고 감탄했다. 그러면서 “과수원에서 따온 배를 보내 얻으니 내가 저자에 가지 않고 구한 것이 기분 좋다네.” 라며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선물로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생활비가 부족할 땐 작지만 커다란 기쁨이었던 것이다.
재상 이보여의 처 이씨는 노비가 수십 명이나 되는 집안 살림을 맡아 다스렸는데, 당대의 관점에서는 집이 가난했으나 가난을 즐겼다고 평가되는 인물이었다. 조상 전래의 노비를 다른 사람에게 잘 매매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수십 명의 노비를 먹여 살리려면 살림이 빠듯했을 수 있다. 생활비로 사용되는 유동 자금이 부족했던 것이다. 고려시기에는 오늘날 관점에서 상당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꽤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가난하다고 평가되는 것을 보면 고려인들이 생각하는 가난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사정이 그런데도 이씨부인은 매번 사람들이 보내오는 선물을 비록 친척이나 오랜 친구가 보낸 것이라 해도 남편의 허락이 없으면 받지 않거나 받았더라도 돌려보냈다. 이로써 명망은 높아졌으나 집은 더욱 가난해졌다고 한다. 선물은 노비가 수십 명이나 있는 재상 이보여의 집에서도 단순히 마음을 나누는 수단 정도가 아니라 살림의 일부를 구성하는 재정의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선물을 받지 못하면 더 가난해질 수 있었다. 이보여 집안보다 형편이 못한 관료들에게 선물의 중요성이 더욱 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물의 수수는 친척이나 친구는 물론 다양한 지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생활 방식이자 관행이었던 것이다.
선물에는 기호품도 있지만 대개 생필품을 보내거나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주고받기도 있었다. 여름에 시중 최종준이 술과 얼음, 맛난 음식을 보내오자, 이규보는 “해마다 천금 같은 술을 보내주고, 얼음과 맛난 음식 곁들여 보냈다네. 한산한 가문의 쇠잔한 병든 늙은이를 사랑하여, 근심 걱정을 풀어주려는 것일세.” 라고 했다. 해마다 보내주는 정례적인 선물이었던 것이다. 때마다 차를 보내주는 사람도 있었다. 최우의 조카인 정안이 화전차를 보내오자, “벼슬이 높아도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내 허물만은 아니지만, 본래 먹을 것이 없는데 하물며 선차仙茶이랴. 해마다 어진 사람이 홀로 보내주시니, 이제야 세상의 재상가가 되는구나.” 라고 시를 지었다. 자신이 재상이 되었다는 실감을 해마다 차를 선물 받는 것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선물을 보내주기를 희망하기도 했다. 이규보는 최수재가 능금과 참외를 보내오자, “이제부터 해마다 보내주시길 바라니, 이 늙은이 비록 늙었어도 혀는 애들 같다네.” 라는 시를 적어 보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지만 선물도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이 받는다. 이규보는 신맛을 좋아하여 자두를 많이 먹었다. 먹다보니 흔해진 자두를 보며 시를 지었다. “이제는 이미 습관처럼 맛보는데, 버리고 던져도 그리 귀한 것은 아니라네, 누가 한산한 가문에 선물을 하려 하겠는가, 녹봉으로 시장에서 사오는 것이지.” 자두를 선물로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시장에서 사와서 먹었다. 문벌도 아니고 권력도 없는 한산한 가문에 선물이 많을 리가 없었다. 일이 생길 때 필요한 청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청탁이 싫어 선물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유응규는 수상을 지낸 유필의 다섯 아들 중에 장남이었는데 살림이 상당히 어려웠다. 남경[양주]에 관리로 파견되었을 때 아내가 출산을 하다가 병을 얻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겨우 나물국이나 마시는 형편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향리 하나가 꿩 한 마리를 보내왔다. “남편이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받지 않았는데 저 하나 살려고 깨끗한 덕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 꿩 한 마리가 대단한 선물은 아니지만 선물과 뇌물의 경계선이 모호했기 때문에 유응규나 그의 아내는 평소에 선물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선물의 수수는 관료들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좋은 방법이었고 대개는 인적 네트워크 안에서 이루어졌다.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했던 이규보는 최씨집권자인 최충헌, 최우와 친분을 쌓으면서 비로소 출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규보는 그들과 상당히 가깝게 지냈고 집권자인 최우로부터는 여러 차례 선물도 받았다.
한번은 쌀과 숯을 보내왔다. 이규보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살림은 기본적으로 녹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신의 시대이자 전쟁의 시기에 녹봉마저 뜸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숯을 구하지 못하면 자주 추위에 떨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우가 쌀과 숯을 보내왔다. 심지어 집의 문 앞까지 실어다 주었다. 최우가 보냈다고 소문이 나니 마을에서는 부러워하는 구경꾼들이 모일 정도였다. 최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규보가 결막염이 생겨 한약재인 용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용뇌는 시중에서는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다는 약재였다. 하는 수 없이 최우에게 부탁하자 곧장 좋은 의사와 약재를 보내왔고 그래서 잘 치료할 수 있었다. 선물의 수수는 최우를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들의 인적 네트워크 속에서 최우와 이규보의 관계를 결속시키는 좋은 수단이었다.
인적 네트워크는 집권자와의 관계에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는 문필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사회였고, 이규보는 최자, 이백순, 하천단, 이수, 이함, 임경숙 등과 함께 최씨정권 아래서 문필 능력을 떨쳤다. 자연스럽게 이들 사이에 나이와 지위를 뛰어 넘는 긴밀한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규보는 자신이 최우에게 추천하여 출세하게 되었던 최자가 제주에 지방관으로 내려가 있으면서 귤을 선물로 보내와 받은 적이 있었고, 이규보를 뒤이어 외교문서 작성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명성을 얻었던 하천단이 어느 날 홍시를 보내오자 답례로 시를 보낸 적도 있었다. 이수가 복숭아를 보내왔기에 감사의 시를 보내기도 했다. 이백순은 물론 그의 동생 이백전과도 친하여 시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하루는 그가 팔팔한 생선을 어부를 통해 선물로 보내왔다. 병으로 몸이 쇠약해져 뼈만 남은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덕분에 싱싱한 생선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규보는 그에게 멀리 제주에서 올라온 귀한 귤 몇 개를 보냈다. 해마다 궁궐에서 임금과 신하가 함께 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그것이 끝나면 왕이 귤을 하사했다. 그것들 중에 몇 개를 이백전에게 보낸 것이다.
이처럼 고려 사회에서는 살림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에 빌리거나 빌려주었고, 작은 것이라도 서로 주고받는 선물의 수수가 생활 방식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가난한 관료들에게 이러한 교환은 살림에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가난해도 서로 도우면 먹고 살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물의 수수는 관료 사회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이상국집
오치훈, 이규보를 통해 본 고려 관인의 경제생활, 한국중세사연구 59,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