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8년 고려 의종 2년 8월 청주부사 최루백은 아내의 장례를 치렀다. 아내 염경애가 사망한 것이 47세가 되는 1146년 1월이었으니 2년 7개월이 지났다. 아내가 사망하자 화장하여 그동안 청량사에 안치해 두었었는데 이번에 장인의 묘소 곁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불교식으로 화장을 했으면서도 3년 상을 지낸 것이다. 최루백이 유학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내에 대한 마음이 애틋했다.
염경애는 대부소경 염덕방의 딸로서 25세에 최루백과 혼인했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최루백은 15세 때 수원향리였던 아버지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혔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도끼를 들고 추적하여 호랑이를 잡아 죽이고 배를 갈라 죽은 아버지를 꺼냈다. 장례를 치르고 여막을 짓고 무덤을 지켰다. 심지어 상례 기간이 끝나자 항아리에 담아 개울 속에 넣어 두었던 호랑이 고기를 꺼내 모두 먹었다. 원수를 갚은 셈이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도 있지만 이 때문에 최루백은 이름난 효자가 되었다. 워낙 유명하여 조선 세종대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 효자로 수록되기까지 했다.
염경애는 관료의 딸로 태어났으나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다. 최루백은 향리 아들로서 더 나을 것이 없었다. 둘이 혼인했으니 살림이 좋을 리가 없었다. 염경애는 과거에 급제한 남편 최루백이 전라도 패주[보성]와 충청도 중원[충주]에 지방관으로 내려갔을 때 개경에서부터 먼 길을 함께 따라 갔다. 군사 업무를 맡았을 때는 한겨울 방바닥 돗자리 위로 올라오는 찬 기운에 아이들과 웅크려 떨면서도 여러 차례 군복을 지어 보냈다. 염경애는 최루백이 하급관료로 받은 녹봉이 적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을 함께 했던 조강지처였다.
무덤에 함께 넣을 글을 작성하는데 가난했던 때에 아내가 한숨 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독서하는 분이고 저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데, 아무리 힘써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뒷날 제가 혹시 불행하게 먼저 죽고 당신이 살아남아 녹봉을 많이 받더라도 제가 가난을 막으려고 애쓴 일은 잊지 마세요.” 그러던 염경애가 최루백이 6품의 우정언에 오르자 기쁜 얼굴로 “이제 우리도 가난에서 조금 벗어나려나 봅니다.” 했다. 그러나 그해 9월에 갑자기 병이 나서 다음해 1월에 사망했다.
하급관료 시절에 가난을 경험했던 최루백, 염경애 부부의 삶은 그들만 겪었던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상당한 관료들이 이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고려 사회였다.
고려에서 가난은 대개 백성들의 몫이었고 부와 재화는 지배층이 소유했다. 백성들이 항상 굶주려 죽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림이 크게 좋아지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았다. 풍년이 들면 그래도 좀 낫고 흉년이 들면 훨씬 어려웠으며 죽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럴 때면 나라나 부자에게 빚을 지는 경우가 많았고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먹고살기 어려워 자녀를 버리고 도망하거나 자신이나 자녀를 노비로 팔기도 했다. 전염병이 돌거나 전쟁이 터지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국가는 생산 기반인 백성들의 몰락을 막기 위해 가난한 백성을 구휼할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래도 가난은 기본적으로 지배층이 아니라 백성들의 몫이었다.
지배층은 달랐다. 특히 지배층 중에는 커다란 부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많은 상속을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지와 재산을 보유하고 축적했고 심지어 수탈을 통해 재산을 긁어모으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지배층이 모두 부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난한 관료들도 많았다.
고려의 관료들은 상당수가 가난한 삶을 살았다. 주로 7품 이하의 하급관료들이 그랬고 3-6품의 중급관료나 2품 이상의 상급관료 중에 가난한 경우도 있었다. 최루백이 6품이 되자 염경애가 이젠 가난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의 말을 했던 것을 보면, 7품 이하 관료는 나라에서 받는 봉급으로 생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부부와 아이들이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조상의 제사와 일가친척의 경조사도 챙기고 손님 대접도 해야 했으니 살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상속 받은 재산이 별로 없는 경우에는 더욱 힘들었다. 토지와 녹봉이 살림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데 하급관료는 그것이 넉넉지 않았으므로 가난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급관료의 자녀로 태어나면 대개는 어리거나 젊은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다. 그런데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고아가 되면 더욱 힘들었다. 고려 때는 아버지가 죽으면 어머니가 살아있어도 고아라고 생각했다. 허재는 증조 때부터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허정이 하급관료인 대창승에 겨우 오른 상태에서 불행히 요절하자 허재는 고아가 되었다. 집은 가난했고 어머니도 늙어 과거를 준비하기도 어려웠다. 급제한 할아버지를 본받아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을 머금고 외고조인 삼한공신 김긍렴의 음서에 의탁하여 관직을 받아 진출하였다.
이인영은 고조가 재상, 증조가 호부상서, 할아버지가 소부감, 외조가 우복야인 중견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 이점은 과거에 급제하기는 했지만 변변한 관직에 임명되지도 못한 채 일찍 죽었다. 이인영은 고아가 되어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할아버지나 그 이상 선대의 지위보다는 아버지의 관료로서 지위와 생존 여부가 어린 시절에 가난을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고려에서 관료 집안의 남자는 대략 18-20세에 혼인을 하고 25세에 과거에 합격을 했다.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후 35-40세에 6품이 되고 45-50세에 4품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7품 이하인 40세 이전에는 가난한 관료로 생활하기 쉬웠고, 4품이 되는 50세까지는 아들의 과거 준비와 딸의 혼인에 비용이 상당히 들어갔다. 조상에 대한 제사나 친인척을 챙기던 당시 문화를 생각하면, 문벌 가문에서 태어나 상속 받은 재산이 많지 않는 한 살림에 여유가 있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상급관료 중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재상 정항은 57세에 사망했는데 30년 간 왕의 측근 관료로 활동했고 11년 간 국왕의 비서관인 승선을 지냈다. 인종이 조문하러 갔다가 집에 저축이 하나도 없는 것을 알고 놀라며 부의를 많이 내려주었다. 수상으로 은퇴한 김지숙은 성품이 청렴하고 깨끗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가 죽자 두 딸이 혼인할 비용이 없어 모두 여승이 되었다. 성균관대사성 최해는 평생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말년에 더욱 가난해졌다. 그가 사망했을 때는 장례치를 비용조차 없어 친구들이 부의를 내어 겨우 장례를 치렀다.
물론 가난한 관료들의 삶을 가난한 백성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백성들의 어려움이 훨씬 더했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몽골과 전쟁이 일어나 강화로 피난한 시절에 관료들은 정말 먹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규보도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비도 몇 있고 말도 있었지만 배고픔을 겪고 있던 이규보는 최우가 월급을 보내오자 정말 감격했다.
벼슬이 3품된 자 많기도 하지만, 세상 가난하기는 이 몸뿐이리.
굶주린 종은 배가 고파 집을 못 짓고, 파리한 말이 쓰러지자 땔나무도 떨어졌다네.
집에서는 술을 못 빚어 병에 술이 없고, 수일동안 불을 못 지펴 솥에 먼지만 쌓였다네.
정승이 이처럼 돌볼 줄 어찌 뜻하였으랴. 특별히 월봉을 내려 굶주림을 위로하셨네.
구슬 같은 쌀이 여기저기 쌓이니, 감격의 눈물 아무리 닦아도 다시 흐르네.
한 섬 쌀로 천년 장수를 비옵나니, 열섬이면 천년을 열 번이나 누리시길.
(동국이상국집, 권18, 최상국에게 올립니다)
당시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강화로 천도한 후에 곧바로 집을 짓지 못했다. 게다가 땔나무도 떨어지고 좋아하던 술도 빚지 못하고 밥도 짓지 못했다. 사정이 이런 데 최우가 월급으로 쌀을 보내오니 울컥하며 눈물이 나고 감격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최우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이처럼 관료들은 상속 받은 재산이 별로 없거나 청렴하여 재산을 모으지 못했거나 하급관료여서 봉급이 적거나 중상급관료라도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저축한 것이 없으면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고려의 관료와 백성들이 가난한 삶을 살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생산력 발달의 수준이 후대에 비해 높지 않았고, 그러한 형편이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다들 가난한 시절에는 가난이 그리 허물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최해가 평생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는 것에서 짐작되듯이 가정의 재정 상태나 가난한 살림살이를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함유일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 공로를 세운 인물에게 주었던 칭호인 태조공신 함규의 5세손이었다. 태조공신에 책봉된 인물은 3,200명이나 되어 통일 당시 중앙과 지방의 대다수 관료들이 책봉되었다. 그래서 태조공신 후손이라 해서 이후 모두 현달한 것은 아니었다. 함규 후손이 그랬다. 아버지 함덕후가 하급관리인 상의봉어동정이 되었을 뿐인데 그나마 일찍 죽어 함유일은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죽자 외삼촌 집에서 자랐다. 15세에 출세를 위해 개경에 올라가니 아버지 친구인 재상 이준양이 불쌍히 여겨 문객으로 살게 해 주었다. 선군청의 서리가 되어 밤낮으로 고생하며 공무를 수행했는데, 가난하여 항상 떨어진 옷과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녔으나 사욕을 채우지 않아 유명했다.
젊은 시절부터 그렇게 살다보니 함유일은 가난이 몸에 베였다. 성품도 화려한 것을 싫어하여 평생 동안 베옷을 입었고 무명 이불을 덮고 질그릇을 썼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 사는 집도 개경 도성의 동쪽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살아 집값이 오를 리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집을 사고자 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재테크를 거부한 것이다.
아내가 많이 서운해 했다. “아이들이 당신이 살아있을 때 생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어찌 그리 무심하세요?” 그가 말했다. “나는 고아로 자라 도와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소. 하지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고 절약하여 집을 일으켰소. 아이들도 절약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 어찌 가난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소. 집이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한적한 곳에 있고 쌓아둔 재산도 없어 도둑맞을 일도 없어 좋은데 왜 굳이 도성 가까이 가려 하시오.” 그는 공부상서까지 올랐으나 80세로 죽는 날까지 집에 저축한 것이 거의 없었다.
당시에도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좀 더 위치가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거나 저축을 하는 등의 재테크가 있었다. 그러나 함유일은 가난을 개의치 않는 생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부의 축적은 좋은 것이지만 하늘의 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하다 해도 절약하고 정직하게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인생관이었다.
함유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재상 주열은 집안 살림을 경영하지 않아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가난한 선비처럼 지냈고, 재상으로 은퇴한 최수황은 집이 가난하여 먹고 입는 것이 없어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가난을 힘들어 하고 벗어나려 하기도 했지만 그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생활 태도, 가난을 바라보는 고려인들의 인생관이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이상국집
이혜옥, 고려시대 여성의 경제관념과 부의 추구, 동양고전연구 23,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