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는 어떤 걸 넣어야 하나?
전역지원서를 정성껏 작성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역 사유'에 대해.
일반인 시선에서는 전역지원서가 단순 사직서의 기능이리라 생각해 퇴사(이직)처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나는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을 거듭하며 전역의 사유를 정성껏 채웠다.
먼저 전역지원서를 작성하는 당시를 복기하면 다음의 이유로 무거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 사실상 첫 퇴사임
- 후회되는 군생활이 생각남
- 군에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개선점이 보임
- 전역 과정에서 나를 보호해 줄 법적 기록물임
이듬해 다시 전역지원서를 읽어봤을 때 약간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전역지원서를 수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하기에 아쉬움을 담아 '전역지원서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는 글을 작성해 본다.
* 전역지원서가 다소 프라이빗하기에 이에 대한 가이드나 방법론의 글이 별로 없다는 걸 발견했다. 이 글이 누군가에겐 뼈대 잡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회상해 보면 군복무에 진심이었던 만큼 전역 자체가 멘털에 대미지(damage) 룰 줬던 것 같다. 단단히 결심도 하고 주변사람에게 알리기도 했고 전역 준비를 실제로 본격적으로 하는 중임에도 막상 실제로 '문서화'하는 행위 자체는 또 다른 감정을 솟게 했다.
그렇다면 전역지원서엔 어떤 게 들어가면 좋을까?
사실 양식도 형식도 자유인 백지를 채우는 과정이라 정답은 없다지만, 이 정도는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취지에서 나열해 본다.
1. 전역의 사유는 보편타당하게
'타의에 의한 전역 사유'는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사유로 소탈한 언어를 사용하기보다 공문서에 작성한다는 생각으로 표현하길 바란다.
"00이 힘들게 해요."나, "00으로 제가 가족을 부양해야 해요."와 같이 한시적인 이유를 있는 그대로 작성하기보다 이미 벌어진 사건 위주로 작성하길 바란다. 근무피로나 가족의 부양은 전역이 아니라 '전출'의 사유에 가깝다. 더 여유 있는 보직에 가면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급적 바뀔 수 없는 걸 작성하는 게 좋다. 과거 사건이나 불가항력, 장기적이거나 시스템적인 문제로.
"00의 강압적이거나 불법적인 행위가 계기가 되어"나, "군 내에서 발생한 (몸 또는 정신의) 질병으로 진료/상담을 받아 오고 있으며 지속 근무가 불가하다는 병원의 판단에서" 또는, "모종의 이유로 최소 00원이 매월 생활비로 필요한데 직업군인으로서는 가족부양의 어려움이 있으니..."
* 이런 사유가 포함된 전역지원서를 읽는 인사담당자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전역을 허가하지 않는다면 '불법 행위는 여차하면 외부로 들출 것' 같고, '군에서 시작된 병으로 몸이 불편하다는 건 어디 가서 더 큰 사고로 이어질 것' 같고, 또한 '월급을 더 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와 같이 이 '상황'은 어쩔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보통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자발적인 전역의 이유만을 늘어놓는데, 그건 전역의 명분으로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전역지원서는 모두에게 공개되는 서류도 아니다. 그동안 군생활에서 어떤 한 상대방에게 불법적이거나 불합리한 행위를 당했다면 지금이 사유서에 넣을 순간이다.(정황상이라도 증거가 있으면 더욱 좋다) 억울한 입장에서 당한 걸 돌려주진 못해도 이 위기로 스스로의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해야 한다. 노무사/변호사에게 법률적 검토를 받아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2. 차곡차곡 쌓은 인사상담 이력
또한, 단순한 변심으로 전역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야 한다. "최초 전역 인사상담은 00에 근무할 때 (직급)님과 했으며..."와 같이 작성한다. 동료나 하급자와 한 상담은 효력이 전혀 없고, 직속상관을 비롯한 전대/전단/본부의 전역인사 담당자에게 유선 또는 직접 찾아가 전역하려는 의지를 밝히고 이를 날짜와 함께 전역 사유서에 기입하면 좋다. 꾸준히 전역 의지를 비추고 준비해 왔음을 드러낼 수 있고 상담 이후 이를 정리한 메일을 보내며 이후 근거도 남길 수 있다.
3. 의무 이행 여부
전역하는 입장에서도 의무가 있다. 바로 통보의 시기와 인수인계이다. 특히 통보의 시기는 지나치면 안 된다. 최소 몇 개월~1년 전에 조직의 이해관계자에게 알리는 게 스스로에게도 유리하다. 직보기간/연가 등을 고려할 때 퇴사 통보는 미리 하는 게 좋으며, 일반적인 회사의 퇴사(통상 1개월 전 통보)와 다른 점은 이 부분이다.
인수인계의 의무 역시 스스로에게 이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단순히 업무 필드에서 본인의 책임을 다하는 것을 넘어 전역의 사유에 이 내용을 포함하면 좋다.
"00년 간 00의 훈련을 충분히 수행해 왔으며.."나, "앞으로 근무지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00 방식으로 인수인계 예정입니다."와 같은 부분을 포함하면 후임자 충원 요청도 동시에 할 수 있으며, 전역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
4. 미래 계획으로 완성하자.
이 부분은 전역지원서의 완성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것만 잘 써도 지원 사유에 차별점을 부여할 수 있다.
"전역 후 00개월에 단기적으로 취ㆍ창업할 계획이 있다. 업종은 00 하고 이를 위해 준비한 건..."
이처럼 구체적인 스스로의 계획을 넣어주면 된다. 근거가 있다면 더욱 좋고, 개인적인 내용도 무방하다.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는"도 사유가 될 것이며, "자격증/전문직을 준비하고 있으며 1차 시험을 합격했다."
이처럼 증빙할 수 있는 내용이면 더욱 좋다. 마지막까지 탄탄해야 군에서도 계획성 있는 전역사유를 보고 인정해 줄 것이다. 그리고 미련 없이 놓아줄 것이다.
* 법률적으로 직업선택과 전직의 자유가 있는 우리에게 '놓아준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더라도 현역군인이 그 법률의 적용을 받는 것 같지 않으므로 이 표현이 오히려 적합해 보여 사용해 본다.
사실 위의 내용은 장기복무자 등 포함한 모든 전역지원자에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소송 등으로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할 입장이거나 이후 전역지원서로 경쟁(?)을 해야 할 5년 차 전역자라면 한 번쯤 활용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육군을 시작으로 규정을 교묘히 바꿔 중기간부의 전역을 막는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쉬운 병역을 마다하고 더 어렵고 명예로운 일을 하기 위해 희생하며 근무한 군간부가 전역까지 틀어 막히는 건 다소 너무한 처사라는 생각에서 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