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정리할 때
군생활을 마무리할 때 또 하나 고통스러웠던 건 의외로 '인맥 정리'였다. 시스템과 체계를 통해 전체적인 방향과 과정을 다듬는 장교라지만 결국 사람을 통해서 모든 일이 이뤄진다. 특히, 공직자의 조직생활은 이런 경향이 더욱 강했다.
사람을 자산으로 여기고 귀하게 여겼던 만큼 이들과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필자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는데, 얼굴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다. 같이 근무했던 사람은 물론,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알게 된 얼굴, 심지어는 30분 이상 이야기 했던 사람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길 가다가도 알아볼 수 있다.
* 별로 친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길에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혼자 알아보는 게 늘 민망할 지경)
사람과의 만남을 좋아하고 잘 기억하다 보면 인맥을 쌓는 데에 유리하지만, 반면에 인맥을 정리하는데 더 큰 고통이 따르는 듯하다. 전역 후에도 내 곁에 남을 사람, 계속 볼 사람, 그리고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을 피킹 하기 어려웠다.
"같이 술 한 잔 할래?"
"00 선배님 진해 오셨는데 얼굴 한 번 볼까?"
전역을 1년여 앞둔 시점 (해군의 도시) 진해에 있다 보니 이런 류의 연락을 수없이 받았다. 도서관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다가도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연락이고, 다음 날까지도 미안한 마음과 함께 그들의 얼굴이 아른아른했기 때문이다. 매번 이런 유혹 앞에 시험받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자리를 거절하고서도 '내가 너무 매정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1. 역시나 가족
결국 인맥을 한 번 정리할 필요를 느껴, 군 내외에서 전역 후에도 볼 사람들을 필터링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이 오래도록 내 곁에 남을까?' 하는 물음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당연히 가족이다.
운이 좋게도 부대의 배려를 받아 전역 전 몇 개월간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을 부여받았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충분한 의논 속에서 '확신에 선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었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아내의 사업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고 수도권으로의 이사를 결심할 수 있었다.
2. 현실적 조언이 가능한 인맥
그다음으로 전역 후에도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을만한 사람들에게 집중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아쉽게도 군생활하며 잠깐 마주했던 그들은 당시 이미 대부분 전역해 있었다. 앞으로의 내 진로에 대해 솔직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염치없이 연락했다. 다만, 그들은 단 한 명도 매정한 거절 없이 기꺼이 나와 만나주었다.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나에게 도움과 자극을 줄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아낌없이 전했다. 전역을 앞두고 고민하는 필자에게 본인만의 해답을 전해주었다.
사업가인 K선배는 내게 전역 직후 한시적으로 서비스직이나 봉사활동을 권했다. '장교 출신은 주로 목이 뻣뻣하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낮추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다른 사업가인 N선배는 포스코에서 진행하는 창업 인큐베이팅 스쿨을 추천하며, 스타트업 창업을 위한 실무적인 제도와 학습 루트를 소개해 주었다.
3. 마음을 나눌 수 있는 3명
마지막으로, 절친한 동료와 근접기수 선후배였다. 7년의 군생활 중 나의 가치를 가장 잘 알아주고 또 옆에서 지켜보며 전우애로 다져진 동료로 3명 정도 추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진해까지도 그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 정도로 신뢰와 의리로 다져진 사람들이었다.
그 외 인간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밤늦게 공부하고 책을 읽다가도 그 3명과의 시간은 종종 가졌다. 오히려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 술자리 대신 카페에서 같이 커피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전역 후에 실컫마셔라'라며 나의 술잔을 자제시키며 배려해 주었다.
인맥을 정리한다고 해서 함께 근무했던 모든 동료와 영원히 절교한다거나, 전화번호를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건 아니다.(극단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선택과 집중이 중요한 시기에 미래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오늘도 내일도 마실 수 있는 술자리'로 나의 미래를 망치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즉, 인맥을 정리하는 건 전역을 앞두고 더없이 소중한 매일의 시간을 더 알차게 채워나가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다. 가지 않은 모임자리 때문에 불필요한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선을 긋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