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프타에서 플라스틱까지

플라스틱 없는 세계 ①

by 조종주

주유소에서 넣는 휘발유와 편의점에서 산 생수병. 이 둘이 같은 원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둘 다 원유에서 출발한다. 원유는 수천 종의 탄화수소 분자가 뒤섞인 혼합물이다. 정유소의 증류탑에 넣고 가열하면 끓는점 순서로 분리된다. 가벼운 것부터 LPG, 나프타, 휘발유, 등유, 경유, 중유. 주유소로 가는 것이 휘발유와 경유라면, 석유화학 공장으로 가는 것이 나프타다.



나프타를 800도에서 쪼개면


나프타 자체는 무색의 평범한 액체다. 이것이 NCC라는 거대한 설비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뀐다.

NCC는 나프타분해설비(Naphtha Cracking Center)의 약자다. 핵심 장비인 스팀 크래커 안에서 나프타는 수증기와 함께 800~900℃의 열에 노출되고, 긴 탄화수소 분자 사슬이 짧은 분자로 쪼개진다. 이것을 '열분해(cracking)'라 한다. 반응은 0.1~0.5초 사이에 끝나야 한다. 더 길면 부산물이 생긴다. 이 극도로 짧은 반응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것이 NCC 기술의 핵심이다.

이렇게 열분해된 결과로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톨루엔·자일렌(BTX) 같은 기초유분이 나온다. 하나의 NCC에서 여러 종류의 기초유분이 동시에 생산되며, 그 비율은 투입되는 나프타의 성분과 운전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그림02-1_밸류체인.png [그림 02-1] 석유화학 밸류체인 개념도 (원유 → 나프타 → NCC(열분해) → 에틸렌·프로필렌·BTX → PE·PP·PVC 등 → 일상 제품)



에틸렌, 석유화학의 쌀


기초유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에틸렌이다. 탄소 2개, 수소 4개로 이루어진 가장 단순한 올레핀이지만, 반응성이 풍부하여 온갖 화학 반응의 출발점이 된다. 에틸렌의 생산량이 곧 한 나라의 석유화학 규모를 가늠하는 척도다. 업계에서 에틸렌을 '석유화학의 쌀'이라 부르는 이유다.


에틸렌에서 갈라져 나오는 제품의 계보는 놀라울 만큼 넓다.


에틸렌 분자를 수천, 수만 개씩 이어 붙이는 반응(중합)을 거치면 폴리에틸렌(PE)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플라스틱이다. 중합 조건을 바꾸면 유연한 필름용(LDPE), 단단한 용기용(HDPE), 신축성이 필요한 용도(LLDPE) 등으로 성질이 달라진다. 비닐봉지, 식품 포장 필름, 각종 용기, 파이프가 모두 여기서 나온다.


에틸렌에 염소를 결합하면 염화비닐(VCM)이 되고, 이를 중합하면 PVC가 된다. 수도관, 하수관, 창틀, 전선 피복 — 건설 현장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다. 에틸렌을 산화시키면 에틸렌글리콜(EG)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폴리에스터 섬유와 PET 음료수 병의 핵심 원료다. 제1화에서 언급한 침구, 의류, 음료수 병이 모두 에틸렌에서 출발한 것이다.


에틸렌과 벤젠을 반응시키면 스티렌이 되고, 스티렌을 중합하면 폴리스티렌(PS) — 흔히 '스티로폼'이라 불리는 단열·완충 소재가 된다. 여기에 아크릴로니트릴과 부타디엔을 결합하면 ABS 수지가 되어 가전제품 외장재, 자동차 내장재에 쓰인다.



나머지 벽돌들


에틸렌만이 주인공은 아니다. 프로필렌을 중합하면 폴리프로필렌(PP)이 된다. 내열성이 뛰어나 자동차 내장재, 전자레인지용 용기에 쓰이며, 코로나19 때 전 세계가 부족을 겪은 마스크 필터(멜트블로운 부직포)도 폴리프로필렌이다. 부타디엔에서는 합성고무가 나온다. 전 세계 고무의 약 60%가 합성고무이며, 천연고무만으로는 세계 타이어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BTX(벤젠·톨루엔·자일렌)에서는 나일론, 폴리카보네이트, 폴리에스터 섬유, 도료의 원료가 만들어진다.

NCC에서 나오는 소수의 기초유분에서 수백, 수천 가지의 제품이 갈라져 나온다. 이 연쇄적 분화의 과정이 석유화학 밸류체인이다.



한국은 왜 나프타에 의존하는가


세계 석유화학의 원료는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은 셰일혁명 이후 풍부해진 에탄을 주로 쓴다. 에탄 기반은 에틸렌 수율이 높고 원료비가 저렴하지만, 프로필렌이나 BTX가 거의 나오지 않는 단점이 있다. 사우디는 원유에서 직접 화학제품을 뽑는 COTC(원유직접분해) 기술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은 석유가 부족하고 석탄이 풍부한 자원 구조를 반영하여 석탄 기반 CTO 공정도 운영한다.


한국은 이들과 다르다. 나프타를 주된 원료로 사용하며, 그 나프타는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


장점이 있다. 나프타 열분해는 에틸렌뿐 아니라 프로필렌, 부타디엔, BTX를 동시에 생산하여 제품 포트폴리오가 넓다. 한국이 합성수지·합성섬유·합성고무의 세 분야 모두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약점도 뚜렷하다. 나프타 가격은 유가에 직접 연동되고, 원료의 해외 의존도가 극히 높아 국제 정세의 변화에 산업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밸류체인의 맨 앞단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동에 놓여 있다. 호르무즈 사태 때 한국 석유화학이 유독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구조 때문이다.


다음 회에서는 이 산업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무게를 숫자로 살펴본다. 에틸렌 10만 톤으로 시작한 나라가 어떻게 1,270만 톤의 세계 4위 석유화학 대국이 되었을까.




참고 자료

산업연구원(KIET), 석유화학 산업 구조 분석 자료

한국화학산업협회, 석유화학 밸류체인 및 제품 분류 자료 (kcia.kr)

IEA, "The Future of Petrochemicals", 2018

월, 목, 토 연재
이전 01화아침에 눈을 뜨면 석유화학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