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세계 ②
한국이 석유화학 세계 4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반도체나 자동차 산업은 뉴스에 자주 등장하지만, 석유화학은 다르다. 일상에서 석유화학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순간이 거의 없지만, 정작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석유화학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산업'이다.
인구 5,000만 명의 나라가 미국,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다음가는 에틸렌 생산국이다. 에틸렌 연간 1,270만 톤. 제조업 생산의 약 6%. 수출의 약 8%. 직간접 고용 30만 명 이상. 이 산업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시작은 1972년, 울산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 따라 울산에 제1 석유화학단지가 세워졌다. 당시 한국에는 석유화학 기술이 없어 일본, 미국의 기술을 도입했다.
초기 에틸렌 생산능력은 연 10만 톤. 당시 일본이 이미 400만 톤 이상이었으니, 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다. 그러나 '만들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수입에 의존하던 합성수지와 합성섬유 원료를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섬유·포장·건설 등 전방산업의 원가 절감과 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1979년 여수에 두 번째 단지가 가동되었다. 울산보다 규모가 컸으며, LG화학(당시 럭키), 여천NCC,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 일부)이 자리를 잡았다. 1989년에는 충남 서산에 세 번째 단지인 대산이 가동에 들어갔다. 한화와 삼성(현 한화토탈에너지스)이 주축이었으며, 이전 두 단지와 달리 민간 기업 주도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1990년대는 황금기였다. 국내 건설 붐과 중국 시장의 급성장이 맞물리면서 에틸렌 생산능력은 300만 톤에서 2000년 600만 톤으로, 10년 사이에 두 배가 되었다(한국화학산업협회).
1997년 외환위기는 큰 충격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산업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효율적 기업이 퇴출되거나 대기업에 합병되면서 현재의 구조가 형성되었다. 한화가 삼성종합화학을, 롯데가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한 것이 이 시기다.
2000~2010년대에도 증설은 이어졌다. SK,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이 설비를 확장하며 한국을 세계 4위로 끌어올렸다. 2022년 에틸렌 생산능력 약 1,270만 톤. 반세기 만에 127배가 된 셈이다.
이 시기의 성장 동력은 무엇보다 중국이었다.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렸고, 한국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국에 대량의 범용 석유화학 제품을 수출했다. 한때 한국 석유화학 수출의 40% 이상이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중국 의존은 나중에 약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석유화학이 '보이지 않는 산업'이라 불리는 것은, 그 제품이 최종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의 제품을 사들여 완성품을 만드는 산업을 '전방산업'이라 한다. 석유화학은 그 전방산업의 목록이 사실상 경제 전체를 아우른다.
가장 큰 전방산업은 포장재다. 전 세계 플라스틱의 약 36%가 포장 용도로 쓰인다. 건설 분야의 PVC 파이프, 폴리우레탄 단열재, 방수 시트도 석유화학이다. 건물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핵심 소재인 단열재가 석유화학 제품이라는 점 — 석유화학이 오히려 탄소 절감에 기여하는 역설이 여기서 발견된다.
자동차에서 플라스틱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전기차 시대에도 배터리 케이스, 내장재, 경량 부품, 절연재에 석유화학 소재가 필수적이다. 한국의 양대 수출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가 모두 석유화학 원료를 쓴다. 반도체 기판의 에폭시 수지, 디스플레이 편광 필름, 2차전지 분리막이 모두 석유화학이다. 농업의 비닐하우스, 의료의 주사기·수액백·마스크 필터도 마찬가지다.
석유화학에 문제가 생기면 그 충격은 경제 전반으로 퍼져나간다. 호르무즈 사태 때 NCC 가동률이 60% 이하로 떨어지자, 석유화학 기업만이 아니라 포장재 회사, 자동차 부품 업체, 건자재 기업들까지 원자재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울산, 여수, 대산. 이 세 곳이 한반도 남부에 삼각형을 이루며 한국 석유화학의 거의 전부를 담당한다. 세 단지는 성격이 다르다. 울산은 정유·자동차·조선과 함께 중화학 공업의 복합 거점이고, 여수는 NCC와 후방 공장이 가장 촘촘하게 밀집한 석유화학 전문 단지이며, 대산은 후발 단지답게 상대적으로 현대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
이 밀집 구조의 장점은 효율이다. NCC, 폴리머 공장, 합섬 공장이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어, 에틸렌이 바로 옆 공장으로 파이프를 타고 이동한다. 물류비가 줄고 생산 효율이 올라간다.
그러나 반대 면도 있다. NCC 원료 공급이 차단되면 단지 전체의 후방 공장들이 연쇄적으로 멈춘다. 호르무즈 사태 때 여수 석유화학단지 전체가 위기에 처한 것이 이 밀집·연결 구조의 취약성이 드러난 사례다.
반세기 성장 신화에 균열이 뚜렷해진 것은 2020년대다. 중국이 자급을 달성하기 시작하고, 탄소 규제가 새로운 비용을 부과하며, 호르무즈 사태는 나프타 의존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여천NCC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이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정부는 NCC 18~25% 감축을 공식 목표로 제시했다.
에틸렌 10만 톤에서 1,270만 톤까지 반세기. 그 대국이 지금, 근본적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다음 회에서는 이 전환을 요구하는 힘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석유는 영원하지 않다. 바닥나기 전에, 석유를 쓸 수 없는 시대가 먼저 오고 있다.
한국화학산업협회, 석유화학산업 통계 및 단지별 현황 자료 (kcia.kr)
산업연구원(KIET), 석유화학 산업 구조 분석 자료, 2023~2024
삼일PwC경영연구원, "위기의 K-석유화학, '팀 코리아'로 돌파하라", 202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