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설탕 전쟁을 벌인 이유

설탕의 모든 것 시리즈 A: 「알쓸설탕」(알아두면 쓸모 있는 설탕 지식)

by 조종주

나폴레옹이 설탕 전쟁을 벌인 이유

설탕의 모든 것 시리즈 알쓸설탕A-10


1806년 11월 21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서 하나의 칙령을 내렸다. 대륙봉쇄령. 영국과의 모든 통상을 금지하고, 영국 선박의 유럽 대륙 항구 출입을 차단한다는 내용이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 패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된 나폴레옹이 꺼낸 경제전쟁 카드였다.


그런데 이 칙령에 뜻밖의 부작용이 있었다. 유럽 대륙에 설탕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유럽의 설탕은 대부분 카리브 해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왔다. 영국이 해상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대륙봉쇄령은 유럽 대륙 스스로를 설탕으로부터 차단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프랑스의 주요 설탕 공급원이었던 아이티(당시 생도맹그)마저 1791년 노예 혁명으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프랑스인들의 커피에 넣을 설탕이 사라졌다.


이때 나폴레옹의 눈에 들어온 것이 사탕무였다.


사탕무에서 당 성분을 발견한 것은 1747년, 프로이센의 화학자 안드레아스 마르크그라프였다. 그의 제자 프란츠 카를 아샤르는 스승의 발견을 현실화하려 수십 년간 노력했고, 1801년 마침내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탕무 설탕은 상업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사탕수수 설탕이 이미 넘쳐나는데 굳이 사탕무에서 뽑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령이 모든 것을 바꿨다. 사탕수수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나폴레옹은 사탕무 재배와 설탕 생산을 적극 지원했다. 유럽 각지에 사탕무 농장과 제당 공장이 세워졌다. "사탕수수 없이도 설탕을 만들 수 있다"는 아샤르의 꿈이 전쟁 덕분에 현실이 된 아이러니였다.


아샤르 자신은 이 과실을 누리지 못했다. 그의 공장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잿더미가 되었고, 영국의 사탕수수 농장주들이 찾아와 사탕무 사업을 포기하면 2만 탈레르를 주겠다는 회유까지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설탕이 주는 달콤한 기쁨을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누리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긴 채 빈곤 속에 세상을 떠났다(나무위키, 「사탕무」 항목).


대륙봉쇄령은 1811년 해제되었고, 나폴레옹은 결국 몰락했다. 하지만 사탕무 설탕 산업은 살아남았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열대 식민지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설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설탕 생산량의 약 20~30%가 사탕무에서 나온다(위키백과, 「설탕의 역사」). 사탕수수는 열대에서만 자라지만 사탕무는 냉대·온대 기후에서도 재배할 수 있어, 유럽과 북미의 설탕 자급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의도치 않게 세계 경제의 지도를 바꿨다. 유럽이 사탕무로 설탕을 자급하게 되면서, 브라질의 사탕수수 수출이 타격을 입었다. 브라질 농민들은 커피 재배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것이 브라질이 세계 최대 커피 생산국이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설탕 한 스푼의 역사 뒤에는 전쟁과 봉쇄, 혁명과 발명, 그리고 세계 경제의 재편이 엮여 있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굶기려 했지만, 결국 유럽에 새로운 설탕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대륙봉쇄령」, 「설탕의 역사」

나무위키, 「사탕무」 (아샤르의 인용과 일생)

생글생글/한국경제, 「나폴레옹 대륙봉쇄령 세계 경제를 바꿨다」, 2020


다음 편 ― 「시험 기간에 초콜릿이 당기는 과학적 이유」: 스트레스 호르몬과 단맛의 비밀스러운 공모.


chojongjoo_A__brunch_mag_A_________.____2____.________._____1_bc59dd08-08d8-439f-8a65-f27ca355b2e0_3.png


매거진의 이전글설탕으로 조각을 만든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