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아줌마의 세상살기
은퇴 전에 나름 '단도리'를 헸다. 나이들면 혼자 시간을 보낼 취미가 있어야 한다길래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예상보다는 그리는 걸 좋아해서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사람치고 정말 열심히 그려대면서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의 경지에 이를 수는 없을터이나 수많은 아마추어 할머니 화가들 중에 한 명으로 합류하는 꿈도 꾸었다. 다른 건 몰라도 명화모작을 하면 1개당 15- 20만원 정도에 팔 수 있으므로 재료값은 벌 수 있겠다 싶었다. 마음의 준비도 충분히 했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아온 덕에 일거리 떨어진 시기를 여러번 겪어봤기에 할 일이 없을 때의 축 처진 상태를 되새기며 머리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돌렸고, 일을 그만두면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어 느무느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한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더 이상 하다가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원래 계획보다 1-2년 은퇴를 앞당겼을 뿐이다.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나의 성향, 혹은 본성이었다. 은퇴 후 책읽고 그림그리면서 서식지에 콕! 박혀 얌전히 지낼 줄 알았는데 그 넘의 '역마살'이 폭발해버린거다. 그것도 오십년 넘게 자신도 모르게 무르익고 또 익어서 발효가 아주 잘 된 채로. 사주명리학에 관심있는 지인들은 '넌 사주에 역마살이 어마어마'해서 절대 집순이가 될 수 없다고 조언했는데, 사주든 아니든 돌아댕기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였다. 특히 초록이들이 많은 숲에 가거나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가면 배고픈 것도 잊어버릴 정도니까.
상황이 이러다보니 좁은 서식지가 너무 답답했다. 복잡한 다운타운 한복판, 상업지구라는 위치는 젊은 직장인이나 나가서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지, 나이가 들어가는 중년 아줌마에게 적합한 곳은 아니니까. 게다가 주변으로 멀쩡한 빌딩들을 때려부수고 더 크고 더 높게 빌딩을 지어대는 경우라니. 소음과 분진을 못이긴 나머지 탈출을 꿈꾸고 여기저기 기웃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고려한 건 '비용'이다. 그래, 현재 서식지를 활용해서 경제적으로 무리없이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해.
최상의 지역은 대전이었다. 나홀로 뚜벅이인데다 벌레를 무서워하기에 시골은 꿈도 못꾸고,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라기도 했고, 주변에 헬스장은 반드시 있어야 하길래 내린 결정이었다. 도시 인프라도 있고 서울보다 집값도 싸고! 게다가 빵순이 마녀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성심당'이 있다!
"엄마, 나 대전에서 1년만 살아볼래."
엄마는 맘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 톤부터 달라졌다. 대한민국 엄마들의 '맘대로 해'는 '너 죽을래? 하기만 해봐라'의 의미라는 건 온 세상이 다 안다.
서울 외곽지역도 알아봤으나 외곽이라고 해봐야 내게 필요한 인프라가 갖춰진 곳은 다른 이들도 선호하는 곳이라 워낙 비싸서 강남 한복판의 내 서식지를 활용해도 추가비용이 들어가고, 요즘 이사비용이 많이 들어서 그런지 매물도 거의 없는데다 괜찮다 싶으면 나오자마자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이렇게 치열한데 서울 외곽이나 근처에서 알짱거려야 해야 해? 한번 나오면 최소 10년 이상 떠돌아야하는디?
차라리 멀리 가서 일년살이를 해봐? 지난 5월 말,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이곳에 살면 어떨지 머리속으로 그림을 그려봤다. 제주도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물론 뚜벅이로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넓고 대중교통수단이 아주 좋은 건 아니지만, 제주버스터미널이나 서귀포버스터미널 근처 혹은 연계버스노선이 있다면 도시 인프라 + 자연 + 휴양지 + 관광지의 장점을 한방에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서울에 올 때마다 뱅기를 타야한다는 부담감도 배제하기 힘들었다.
이젠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처럼 언제까지 방을 구해야한다거나 직장 때문에 장소가 국한된다면 스트레스가 쌓이는 가운데에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팍 줄어서 되려 쉬울 수도 있고, 이래저래 선택지가 너무 넓은데다 현재의 서식지에 단점만 있고 장점이 거의 없다면 결정이 쉽지만 뚜벅이에게 필요한 대중교통과 단열 하나 만큼은 잘 되어있다는 정점도 있는(바로 전 서식지의 경우 단열이 엉망이라 여름은 한증막, 겨울은 시베리아였다) 바람에 안그래도 결정 장애 중증 환자인 마녀 아줌마의 손발은 움직이길 거부했다. 하기사, 원래부터 생각이 너무 많아서 돌다리 두들기다 부서져 버리는 경우가 많은, 이래저래 느려터진 사람이므로.
지금까지의 궁리가 모두 시간낭비에 쓰잘데 없는 망상이었을까?
그런 아닌 듯 했다. 문제를 일으킨 '진범'이 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1.5룸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이 붙은 원룸에서 60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답답함과 대한민국 최악의 소음과 매연이 큰 범인이긴 하지만 그 옆 그림자에 가려진 범인 한 놈을 더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이미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상이었다. 준비를 잘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는 거다.
타고난 재능이 충만한 건 아님에도, '모작'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나만의 그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직업이었던 번역도 그랬다.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고? 글쎄,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나, 온전한 창착과는 하늘과 땅처럼 간극이 컸다. 그림이든 글이든 '모작'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맞다. 이제 그림, 얘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니? 다시 화실에 나가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비용도 만만치 않은 화실에 처박히는 것도 내키지 않고, 지금 내 상태에서는 돌아다니면서 자유드로잉을 하는 게 훨씬 더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다.
자, 인정하자. 아직 준비가 덜 된거야. 완벽한 준비를 할 필요도 없고 불가능하지만, 이제 진짜 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난 현 상황에 맞는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놓고 일을 벌여야 해. 아니면 포기하거나. 포기한다고 누가 뭐랄 것도 아니고, 어쩌면 주변에서는 차라리 포기를 하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할 터이지만 나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다. 그럼 결론은 일단 뭐라도 해야해.
못먹어도 Go Go Go =3 =3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