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아줌마의 세상
인생 후반전의 목표를 정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고 해봤자 소용도 없다. 이제는 그냥 무사히 가기만 해도 감사 땡큐하는 시기가 되었는데, 천성적으로 경쟁을 부담스러워하고 스팩타클과 스릴넘치는 영화도 피하고, 심지어 사람들이 환호하는 감칠맛 진한 음식조차 힘들어하는 내게는 딱 맞는 상황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나의 삶은 시간과 함께 전진만 가능하며, 잠시 옆길로 새거나 주변을 둘러보는 건 괜찮지만 제자리 걸음만 할 수 없으므로 최소한 방향은 있어야 너무 헤매거나 떠돌지 않게 된다. 그런데 방향 잡기도 쉬운 건 아니다. 뭔가 해내야하는 의무가 없기 때문에 이걸 해도 되고 저걸 해도 되는 거라서 도리어 뭘 할 지 우왕좌왕하게 된다. 부지런히 가지만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성과나 의미만 따지지 않지만 너무 무의미하지 않게 살아간다는 건 말이 쉽지 정말 애매하다.
그러는 중에 황안나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교직생활 정년 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뚜벅이 여행을 시작했고 국토종단을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걸으면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도 그리기 시작하셨으며 현재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가신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 인생 롤모델은 70대 중반에 그림을 시작해서 99세 별세하실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미국의 모지스 할머니 였으나, 내게는 더욱 맞춤형 롤모델 한분이 등장하신 셈이다. 여행과 그림이라니, 그거야말로 내가 꿈꾸던 - 꿈이라고 표현하지만 이건 목표가 아니다 - 삶이다. 이분들처럼 그림으로 유명해지거나 책을 내거나 전시회를 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 현 단계의 내가 원하는 방향이라는 의미다.
얼마 전 트레킹 당일 여행을 하면서 초반에는 힘들었다. 아이고, 그냥 집에 있을 걸, 너무 힘들어서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지에서는 누구보다도 잘 걷고 어느 정도의 경사진 흙길도 괜찮은데 반해, 급경사이거나 돌이나 자갈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은 대단히 힘들어 하는데, 문제는 한국의 산은 거의 돌산이라는 거다. 하지만 막상 다녀오고 보니, 다리에 힘도 더 들어가고 근육이 살짝 아픈 걸로 봐서 헬스장에서는 안쓰던 근육을 사용했다는 의미이므로 힘들더라도 한달에 한번은 다른 이들과 트레킹여행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헬스장 가기 전에 삼십분 정도 서식지 근처에서 조금씩 제자리 뛰기 혹은 느린 속도로 조깅도 해보는데 처음보다는 좀 더 잘 되고 종아리 근육도 돌아온 듯 하다. 걷기만 하는 것보다는 약간 뛰어줘야 한다는 말이 맞긴 한가보다.
여전히 진행 중인 그림에서도 여러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붓이 아닌 것도 시도하고, 그리는 방법도 좀 더 다양하게 해보면서 나만의 방법을 찾고 싶다. 실패할 확률이 엄청 높지만 못올라갈 나무를 올라가다 떨어져도 올라간 만큼 이득이니까 괜찮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시점에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뭔가를 열심히 했을 때 당장 눈에 보이는 커다란 성과가 없어서 무의미하게 끝나는 것 같다가도 다른 무언가로 이어지는 신기한 경험을 많이 했고, 심지어 이번에는 뭔가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 말년에 후회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면 대부분 돈 벌고 저축하는 데에 집중하고 못쓰고 죽어서 억울하다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나도 그럴까? 나는 아니라는 결론이다. 돈을 마음대로 쓰거나 좋은 물건을 사지 못했지만 그게 억울하거나 아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의 여행과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나중에 진심으로 후회할 거 같아서,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하기로 했다.
요악하자면,
1.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여행
2. 그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만 하면서 살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당분간 혹은 한동안 다른 뭔가가 치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내 시간을 여기서 쏟아넣기로 했다. 현재 상황에서 방향설정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