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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Feb 06. 2024

깍두기로 살아가기

마녀 아줌마의 세상 살기

허약체질, 발육부진, 막내

이 모든 요소를 골고루 부여받은 덕분에 내 인생 최초의 키워드는 '깍두기'가 되었다.


전조는 오래 전부터 나타난 듯 하다. 태어날 때부터 조그맣고 잔병치레가 끝내줬다고 들었고,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편도선염으로 열이 자주 오르면서 제대로 못자라서 그랬는지, 막판 스퍼트로 키가 자라면서 현재는 보통 수준이지만 어릴 때는 또래보다 거의 이십 센티미터 정도 작았다. 이런 탓에 집에서도 있으나마나, 어딜 가도 꼬꼬마 취급에, 또래 아이들과는 덩치가 맞지 않아 동네에서도 나보다 어린 아이들하고 노는 경우가 더 많았고, 공기놀이나 줄넘기를 해도 언제나 승부와 상관없는 '깍두기'였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은 엄청 좋아졌지만 내향적 성격과 프리랜서 번역쟁이와 시간강사라는 직업이 미혼이라는 상황과 적절히(?) 어우러진 덕분에 직장 동료도 없고, 영향력도 없고, 널리 사람들을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이 많은 미혼은 가족이 모여도 마치 위성처럼 주변만 뱅글뱅글 돌 뿐이다. 어른들 사이에 끼워주지도 않고 조카들 사이에 낄 수도 없고, 먹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좌중을 휘어잡는 언변도 없고. 언제나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옆에 구겨져 있다가 '누구 물 갖다 줘라, 과일 깍아 줘라, 커피 타 줘라' 심부름이나 해야하는 깍두기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혼자 살면 외롭고 제대로 차려먹지 못할터이니 뭔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불러내서 일단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완전 오해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언니가 와도, 오빠가 와도, 심지어 조카가 와도 누구 누구 온단다, 너도 와서 먹고 가라며 전화를 걸었다. 나이 많은 싱글이 제일 싫어하는 게 바로 그건데! 


깍두기 인생은 주사위처럼 예측 불가!


여기서 반전!

깍두기라고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오십대가 되면 인생 곡선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단, 갑자기 휘리릭 변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자취가 모여 곡선의 방향, 즉 상승선과 하향선을 결정하므로 어떤 방향인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래도 상황이 나쁘지 않은(!) 깍두기가 누리는 장점을 꼽자면, 통제권이나 영향력은 여전히 없는 반면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를 통제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는 마음도 강해서, 부모든 연인이든 사랑하는 누군가가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깍두기는 그런 마음이 없으므로 해야할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특히 나이든 싱글 깍두기는 상황이 더 좋아진다. 어릴 때는 나를 걱정하는 가족들, 특히 엄마의 우려 섞인 참견이 있을 수 밖에 없으나 지금은 스스로 감당 못 할 엄청난 지출이나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만 알아서 조절한다면 아무도 못 말릴 뿐 아니라 심지어 응원도 해준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원했던 것,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거다. 


누군가에게는 극강의 무책임과 이기주의적인 삶으로 비칠 수 있고, 실제로 냉정하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상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도움은 못줄 지언정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찾고 싶다. 나도 평범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미혼, 프리랜서, 내향적 성격, 장롱면허

이 모든 요소를 골고루 부여받은 덕분에 내 인생의 두 번째 키워드는 '나홀로 뚜벅이 여행자'가 되었다.


나홀로 뚜벅이 여행. 원할 때면 혼자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낭만'으로 간주될 수 있다. 비록 실천으로 옮기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실제로 여행을 하다보면 '아니, 혼자 왔어요?'라고 묻는 사람들을 꽤 만나고, 그렇다고 대답하면 그들의 얼굴에는 신기함과 부러움과 걱정스러움이 적당히 뒤섞이면서도 '쯧쯧'하는 표정이 떠오른다. 혼자 다니는 젊은 애들은 가끔 볼 수 있어도 중년여자가 백팩 하나 달랑 메고 다니는 건 흔한 광경은 아니더라. 통영과 제주도에 숙박여행을 갔을 때나 심지어 당일치기로 춘천에 갔을 때도 어떻게 혼자 왔냐고 놀라기도 하더라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성인이 되면 직장과 결혼을 통해 인간관계가 저절로 늘어나고,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직장 동료 뿐 아니라 남편의 가족들과 아이와 관련된 각종 학부모 모임, 이웃 등등 챙겨야할 관계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게 된다.  언제나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하는 주부들은 물론이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직장인들은 '다 때려치고 혼자 여행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 쯤 해봤을 것이다. 


결국 혼자서 일주일만이라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기도 하지만 나홀로 여행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에 비해 나같은 부류는 종교든 취미든 봉사활동이든 여러가지 사회 단체나 모임 등을 부지런히 찾아서 가입해야 그나마 '인간들'과의 교류가 가능한 상황이므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혼자 놀 수 밖에 없는데, 나는 혼자 노는 쪽이다. 이런 나를'대인기피증 환자'라고 여길 지 모르지만, 사람들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니여서 기회가 있으면 얼마든지 모임에 참석해서 잘 놀다 오면서도 그동안의 '짬밥'으로 다른 이들보다는 나홀로 잘 노는 것 뿐이다.  


이런 상황과 특유의 성향이 맞물려 짧게든 길게든 혼자 여행을 다니게 되고, 심각한 난시인 까닭에 운전면허증을 '장롱'속에 모셔둘 수 밖에 없기에 별 수 없이 뚜벅뚜벅 걸어다니고 있다. 결국 내 인생의 키워드에 '나홀로 뚜벅이 여행자'가 추가되었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이런 여행에도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뚜벅이 여행은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어서 무심결에 놓칠 수 있는 소소한 것들도 보인다. 목적지까지 걷는 도중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들은 내 옆으로 쌩~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인데, 특히 나홀로 뚜벅이로 가면 온전히 내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나홀로 뚜벅이는 모든 게 '내 맘대로'이다. 계획할 때도, 변경할 때도, 취소할 때도 내맘대로 할 수 있다. 숙소에서의 출발 시간도 내가 정할 수 있고, 뭔가 계획했더라도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면 곧장 'off' 모드로 돌입할 수도 있다. 여행 도중에도 원하는 장소에서 좀 더 머무를 수 있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워낙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데다 음식도 남들의 눈으로 보면 '새 모이'만큼 먹는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된다.


하지만 단점도 많고, 때로는 장점이 단점으로 둔갑할 수 있다.  

일단,  시간낭비를 감수해야한다. 서울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두세번 갈아타야할 때, 첫번째 버스는 시간표를 알아내어 맞춰나갈 수 있지만 연계 버스와의 시간이 안맞는 경우가 많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의논하거나 의지할 수 없어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한다. 나름 자립심을 키울 수 있다는 면도 있으나 가끔은 마음이 귀찮고 몸이 힘들다. 특히 대부분의 짐을 혼자 들고 다녀야 하므로 짐을 줄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하며 정 안되면 현장구매를 하겠다고 마음 먹어야 한다.


만약 '인생사진'을 좋아한다면 셀카봉을 이용하거나 주변의 누군가에게 부탁해야하며, 그런 식으로 사진 몇 장 정도는 건질 수 있지만 짐 무게와 부피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와중에 셀카봉까지 얹어 가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 아무리 가벼운 걸 사도 최소한 300-500그램은 나가고 가벼운 것도 모이다 보면 결국 무거워서 사용안하게 되고 사실상 '인생사진'에 관심없는 내게는 이런 건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나홀로 뚜벅이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몸은 힘들고 시간낭비도 하고, 황당한 일도 벌어지고, 연계버스를 놓칠 때도 있는 건 맞으나, 세상을 대하는 관점이 달라진다. 예민하고 급한 성격은 변하지 않을테지만, 아무리 핏대를 세워봤자 나만 손해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냥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지, 그나마 이만한게 다행이지" 라는 식이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면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게 되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할 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막연한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시행착오를 할거고 실수도 하겠지. 방향도 바꿀거고,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고. 하지만 이제는 그게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지점에서 또 시작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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