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Jan 05. 2024

낙서는 소중해

마녀 아줌마의 세상살기

여자애들은 공주를, 남자애들은 로봇을 그리던 시절, 학교에서 선생님이 야단칠 때나 조회시간, 쉬는 시간 혹은 수업이 따분할 때면 낙서를 했다. 교과서와 공책 여백은 늘 무언가로 가득하고, 교과서 한 귀퉁이에 연속 그림을 그려서 일종의 '수동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했다. 대학에 가서도 그 버릇은 이어져서 교수님이 몇십년 된 노트를 줄줄이 읽을 때나 공강 시간에 근처 카페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도 냅킨에 뭔가를 그려대었을 뿐 아니라 소설이나 시집을 사면 그 속에 뭔가 끄적거리며 온갖 폼은 다 잡았다.


그런 버릇을 밀어낸 게 바로 컴퓨터라는 괴물이었다. 대학 4학년때 중앙도서관 로비  유리관에 전시된 컴퓨터를 보았다. 아, 저게 컴퓨터란다. 물론 그 전에도 공대생들은 컴퓨터를 접했지만 문송들, 일명 '문과여서 죄송'한 우리들에게는 낯선 물건이이어서 졸업 후 취업을 위해 타자기 사용법을 익히고 처음 번역일을 할 때도 종이사전을 뒤적이며 원고지를 사용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컴퓨터는 놀라운 속도의 발전과 전파력을 보여 주었고, 결국 나는 컴퓨터와 전자사전로 번역하고, 그래픽을 배우고, 웹디자이너가 되고, 단순한 코딩정도는 메모장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과정 자체는 흥미로왔다. HTML, XML, 자바 스크립트 등등 기초적인 것들을 익히면서 '내 남자친구는 컴퓨터'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은 것도 있으니, 그게 바로 낙서하는 버릇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컴퓨터를 접한 이래 거의 삼십년이 넘는 동안 자판만 신나게 두드렸고 손으로 무언가를 써본 적은 거의 없어서 안그래도 악필인데 더더욱 심각한 악필로 전락하고, 예쁘게 못쓰니까 손글씨를 회피하게 되고, 낙서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으나 그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에 비하면 디지털 의존도가 낮은 셈이고, 국가차원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상황이므로.


그런 와중에 내가 손글씨와 낙서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그림의 선이 자연스럽게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연습이 필요한 건데, 어떤 패턴을 두고 의도적으로 하는 것보다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다보면 자신만의 그림체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고 생각하기에 연필이나 펜 사용을 늘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판만 두드리다 보니 그림은 물론이고 간단한 글씨 쓰는 것 조차 어색하므로 연필이나 펜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조금 의식적으로 사용 시간을 늘려야 할 것 같다.


어쩌다보니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비슷한 정도로 모두 접한 세대가 된 셈인데, 인생의 정립기인 이십대 초반까지 아날로그 세상에서 살았기에 디지털의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아날로그에 대해 희뿌연한 안개같이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것 같다. 원래 지나간 사항에 대해서는 과대포장하기 마련이고 - 가끔씩 더 나쁜 방향으로 기억하지만 대부분은 예쁜 포장으로 장식하는데 - 그런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그때의 감성을 잊기 힘들고, 이젠 원하는 게 있으면 미루지 말고 생각도 깊게 하지 말고 후다닥 해야하는 나이이므로 직접 하는 일만 남아있는 듯. 이제 손이 움직일 시간이다.


백수는 바쁘다! <끝>

  

작가의 이전글 2024년 일출 - 와룡공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