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누가 왕일까요?

by 송대근
“오늘도 아주 임금님이 행차하셨어!”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엔 가시 돋친 피로가 맺혀 있습니다. 아내의 어깨는 항상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들어옵니다.


온종일 타인의 날 선 감정을 받아낸 그 어깨는 이제 단순한 근육통을 넘어선 부조리의 무게를 견디고 있습니다.


“오늘도? 어제도 오셨다더니.”

“응. 희한하지. 병원에서 가장 목소리 큰 분들은 십중팔구 ‘급여 1종’ 이라는 거.”


급여 1종.

국가가 의료비를 거의 전액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자들입니다. 사회적 지표로는 취약 계층이지만, 병원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들은 무제한 한도의 법인카드를 손에 쥔 'VVIP'로 돌변합니다.


병원은 국가로부터 확실히 정산받을 매출원으로 그들을 모시고, 환자는 자기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없으니 모든 서비스를 쇼핑하듯 요구합니다.




스테이션 안, 차트를 넘기는 손끝이 무겁다. 이 씨의 고성이 진료실 문틈을 타고 복도로 터져 나왔다.


“내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데 엑스레이만 찍어? 당신들 돌팔이야?”


이 씨의 목소리는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진료실 안 의사는 마스크 위로 지친 기색을 숨기며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어르신, 엑스레이상 가벼운 두통 외엔 별다른 소견이 없으세요. 약 처방해 드릴 테니 우선 며칠 드셔보시고...”

“됐고! CT 찍어줘!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여기서 나가다 죽으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의료진에게 ‘책임’이라는 단어는 치명적인 협박이다. 병원 행정팀에서도 불만을 만드느니 원하는 대로 해주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낸다.


결국 임상적으로 불필요한 CT 촬영이 결정됐다.이 씨는 승리감에 도취한 듯 굽었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어깨를 으쓱이며 검사실로 향했다.


모두에게 제한된 인력과 장비 그리고 시간은 오롯이 그의 ‘기분’을 달래기 위해 소모되었다.


그 소란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대기석 구석, 잿빛 얼굴을 한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정밀 검사를 위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노신사는 이 씨가 고함을 칠 때마다 움찔거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 씨와 같은 ‘가짜 왕’들의 막무가내식 요구를 들어주느라 일정은 도미노처럼 뒤로 밀리고 밀렸다.


검사실에서 인터폰이 울렸다.


“CT 일정이 너무 지체됐어요. 지금 장비 점검 시간도 다 됐고, 뒤에 응급실에서 올라온 환자까지 있어서 오늘 외래 검사는 더 이상 못 받아요.”


시계를 보니 이미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힘없는 걸음으로 노신사에게 다가갔다. 노신사는 내가 다가가자 희망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오늘 앞선 검사들이 너무 지체되어서, 일정이 모두 마감되었습니다. 오늘은 진료가 어려우실 것 같아요.”


노신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낡은 보따리를 꼭 쥐었다.


“아... 선생님, 제가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노신사의 갈라진 목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하지만 결정은 바꿀 수 없었다. 이미 이 씨의 '생떼'가 소모한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예약 잡아드리면 일주일 정도 뒤고, 정 급하시면 내일 일찍 다시 오셔서 대기를 걸어보셔야 할 것 같아요.”


노신사는 한참 동안 바닥을 응시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내일 다시 와보지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는 그의 뒷모습 뒤로, 검사를 마친 이 씨가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이 씨는 “진작 해 줄 것이지!”라며 으스댔고, 노신사는 그 소란을 피해 어둠이 깔린 병원 로비로 사라졌다.

진짜 아픈 이는 밀려나고, 공짜 쇼핑을 즐기는 이가 당당히 입장하는 촌극.


하지만 이보다 더 지독한 연극은 따로 있다.



오후 진료, 화려한 명품 백을 든 젊은 여성이 한 할머니를 부축하며 들어왔다. 할머니의 차트에는 선명하게 ‘급여 1종’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전혀 가난해 보이지 않는 복장. 재산을 가족 명의로 돌리고 스스로 무연고자가 되어 행정상 가난을 쟁취한 이들. 이른바 ‘가짜 수급자’들이다.


“보호자 분,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그냥 먼 이웃이에요. 제가 조카딸뻘이라 돌봐드리는 거예요.”


내 물음에 젊은 여성이 눈을 피하며 차갑게 답했다.

나이 차, 이목구비, 기색이 누가 봐도 모녀 사이 같지만 그들은 한사코 남이라고 우겼다. 가족이 있으면 수급자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가짜 가난’으로 병원의 모든 영양제와 검사를 스스럼없이 요구했다.


“요즘 기력이 없네. 저번에 맞은 영양제 좀 놔줘.”


국민의 혈세로 채워진 영양제가 할머니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동안, 조카딸이라 주장한 여성은 옆에서 최신형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진료가 다 끝나고 방을 나서던 찰나, 할머니가 다리가 휘청이자 여성이 급히 팔을 붙잡았다.


“아이고, 조심 좀 해!”

“미안하다... 엄마도 이러기 싫은데, 요즘 자꾸 다리에 힘이 풀리네.”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엄마’라는 단어가 허공에 흩어졌다. 여성은 당황하며 내 눈치를 살폈고, 이내 할머니를 잡아끌듯 서둘러 복도를 빠져나갔다.


행정 뒤에 숨겨진 탐욕과 기만.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내가 지키고 있는 이 자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문해야 했다.




아내는 식탁 앞에 앉아 그날의 울분을 쏟아냈습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을 이용하는 건 잘못됐잖아. 국가의 선의가 이렇게 영악하게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웃으며 주삿바늘을 꽂아야 해.”


저는 아내의 거친 손등을 어루만졌습니다. 독한 소독제 냄새와 사람에 치인 피로가 빠져나갈 줄 모르는 손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기묘한 연극을 만든 장본인은 과연 누구인지.


여기선 누가 왕일까요? 이 왕은 눈이 없습니다. 마치 제비에게 사파이어 눈알을 모두 뽑아 바친 행복한 왕자처럼 말이지요.


국가라는 이름의 행복한 왕자는 자신의 눈을 뽑아 빈곤이라는 추위를 막아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없어진 왕자는 이제 자신이 베푸는 선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가 그 선의를 무기로 휘두르는지 보지 못합니다.


시스템의 맹점 속에서 ‘급여 1종’이라는 이름의 왕관을 쓴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이 현장의 인내와 또 다른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왕에게 선택받는 순간, 사람은 누구나 기고만장해집니다.

다만, 그 자리에 누가 앉느냐만 달라질 뿐입니다.



저는 그저 오늘 하루도 세상의 온갖 변덕을 받아내느라 고생한 나의 왕을 위해, 따뜻한 차 한 잔을 건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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