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도 포기한 15명의 사정

by 송대근
“이번 달은 정말... 사람이 아니네.”



단톡방에 툭, 하고 올려진 한 장의 사진이 밥상 위의 온기를 단숨에 앗아갔습니다.

젓가락을 쥔 아내의 손에는 힘이 없습니다. 저는 말없이 국그릇을 채워주며 그 사진을 살핍니다. 그건 바로 다음 달 (*)듀티표 입니다.


“이 듀티를 사람이 어떻게 해?”

아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습니다. 종이 위에는 'N-N-N-O-D'라는, 얼핏 봐도 기괴한 문자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밤샘 근무를 세 번 연달아하고, 하루 겨우 눈만 붙인 뒤 다음 날 새벽같이 다시 데이 근무로 출근해야 하는 일정.


저는 달력을 훑습니다. 우리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은커녕, 아내가 제시간에 잠들 수 있는 날조차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오프가 8개밖에 안 되네. 그마저도 나이트에 붙은 오프라 잠만 자다 끝날 텐데. 수쌤한테 말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제 조심스러운 말에 아내는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말한다고 달라지겠어? 다들 사정이 있대. 왜 우리 병동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삶을 이토록 무참히 토막 내는 걸까요? 병원시계는 사회의 것과 다르게 흐르기는 하지만, 아내의 눈 밑의 다크서클을 볼 때마다 저는 그 비정함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결국 아내는 밥을 제대로 비우지 못한 채 안방에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그 모습 뒤로, 내일부터 시작될 아내의 듀티란 이름의 화약냄새가 느껴집니다.


그 느낌은 마치, 바다 위에서 지옥 같은 입항 스케줄에 시달리며 12시간씩 당직을 서고, 8시간 동안 작업을 하고, 4시간도 채 쉬지 못한 채 다시 출항해야 했던 과거의 상하이 항구의 기억 위로 겹쳐 보였습니다.




스테이션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게시판에 새 듀티표가 붙자마자 인계 시간 전후의 간호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날 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수쌤! 저 15일 (*)원티드 썼잖아요. 동생 결혼식이라고 두 달 전부터 말씀드렸는데, 왜 이브닝으로 되어 있어요?”

“선생님, 이번에 (*)나오데 실화예요? 신규쌤 인계받다 졸면 책임지실 거예요?”


수간호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모니터 뒤로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는 설명이라기보다는 항복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 앞에 떠있는 '간호사 스케줄 프로그램'. 하지만 화면 중앙에는 조롱하듯 커다란 빨간색 팝업창이 떠 있었다.


[Error: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조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최첨단 AI조차 포기한 8절지의 알고리즘. 기계도 계산해내지 못한 정답가장 조용한 인간의 수명으로 메꿔진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다들 여기 좀 봐봐.”

수간호사가 한숨을 내쉬며 메모장 파일을 가리켰다. 그 파일 안에는 병동 간호사 15명의 '조건'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수많은 입사자와 퇴사자들의 이름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병원이 이런 식으로 돌아갔는지 증명하는 듯했다.


김 선생: 자녀케어. 데이(D) 고정, 주말 제외.

박 선생: 개인건강 문제. 나이트(N) 절대 불가.

이 선생: 자녀케어. 미드(M)만 가능.

최 선생: 부모간병. 주말 전담.

임 선생: 출산휴가.


“애 등원시켜야 해서 데이만 선다지, 밤에 부모님 모셔야 해서 나이트 빼달라지, 몸 안 좋아서 이브닝도 못 서지... 그럼 남은 나이트랑 주말은 누가 서?”

수간호사 선생님은 거기까지 말하고 우리를 흘기듯 쳐다보았다. 결국 너희처럼 ‘젊고 사정없는 애’들이 메워야지. 라고 말하는 듯했다.


결혼을 했어도 아이가 없다는 이유로, 건강하다는 이유로, 혹은 딱히 거절할 줄 모르는 성격이라는 이유로 우리의 듀티표는 난도질당했다.

병원은 교대근무자에게 최소한의 휴식권을 보장해야 하지만, 인력이 부족한 병동에서 그건 교과서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임쌤은 출산휴가 갔잖아. 6개월간은 인력이 계속 부족해.”

“아니 그럼 한 명 더 뽑아요! 이렇게 6개월을 버티라고요?”


한숨을 쉬는 수간호사에게 따지듯 물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바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채용은 수간호사가 아닌 간호과장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 에서인지 채용을 하지 않는다.

돈 때문이겠지.


나이트를 세 번 하고 오프, 하루 뒤 다시 데이. 이 일정은 신체 리듬을 완전히 파괴한다. 말이 좋아 오프지, 아침 9시에 퇴근해 자고 일어나면 오후 4시. 그 상태로 다시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려면 속박에 가까운 겨우 몇 시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수쌤, 저 이번 달에 남편이랑 밥 먹을 시간도 없어요. 이건 진짜 너무하잖아요.”

내가 겨우 내뱉은 말에 수간호사가 지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미안해. 근데 AI도 답 없다잖아. 다음 달엔 내가 어떻게든 조정해 볼게. 이번만 좀 버텨줘.


'이번만'이라는 말은 벌써 수개월째 반복되는 후렴구였다. 결국 우리 같은 3교대 간호사들에게 휴일이란 가족과의 시간이 아니라, 다음 근무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강제로 전원을 끄는 '충전'에 불과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머리도 말리지 못한 채 쓰러지듯 잠에 들었습니다. 저는 아내가 보내준 다음 달 듀티표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몇 번이고 수정되고 바뀌는 듀티들, 그 듀티들이 마치 아내의 몸에 새겨진 멍자국처럼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몇 시간 뒤,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난 아내가 주방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여보, 아까 바뀐 듀티표 다시 봤어. 진짜 엉망이긴 하더라.”

“그렇지? 열받아. 그냥 퇴사할까 봐.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아내가 입을 내밀며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저는 아내의 옆자리에 앉아 듀티표의 한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이 날, 당신 퇴근하면 근처 베이커리라도 가자. 좋아하는 빵 먹으면서 딱 세 시간만 데이트하자.”

“그 피곤한 몸을 끌고 거길 어떻게 가... 차라리 잠이나 자지.”

“그럼 내가 가서 사 올게. 어차피 난 이 날 쉬니까.”

“안돼. 당신 피곤해서 안돼. 나중에 같이 가, 그냥.”


아내는 투덜거렸지만,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병원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갈려 나가는 일상이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기어코 찾아낸 '시간의 가치'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듀티표가 우리를 찢어놓으려 해도, 그 짧은 틈을 사랑으로 메우는 한 우리의 삶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집에서 소금빵 만들어 줘. 한번 해보기로 했잖아.”

예전에 우연히 본 소금빵 만드는 영상. 둘이서 즐겁게 만들어보자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듀티표에 쌓인 스트레스도 치대는 반죽처럼 날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아내의 목소리에 생기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비록 내일도 차가운 병원으로 향해야 하지만, 오늘의 이 따스함이 아내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듀티표: 교대근무 간호사의 근무일정표.
(*)오프: 교대근무 간호사의 휴일. 해당월의 휴일개수와 맞춰준다.
(*)원티드: 간호사 개인의 희망휴일.
(*)나오데: 나이트-오프-데이. 야간근무가 끝나자마자 다음날 새벽근무로 투입되는 것으로 심각한 건강손상을 초래하며 동시에 휴일 하루가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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