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엔 누가 쉴래요?

by 송대근
아내의 가방에는 한복 대신 유니폼이 들어있습니다.



명절을 앞둔 전날, 거실의 풍경은 사뭇 낯섭니다.

TV에서는 고속도로 상황을 알리는 뉴스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고향으로 떠나는 이웃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로 복도가 소란스럽습니다.


하지만 저희 집 식탁 위에는 정갈하게 다려진 한복 대신, 빳빳한 간호사 유니폼과 아내의 손때 묻은 작은 망치가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망치는 어디다 쓰려고?”

“나이트 때 약 부수는데 쓸 거야. 이게 아주 도사거든.”


아내는 이번 설 연휴 내내 나이트를 자처했습니다.

누군가는 명절에 밤샘 일을 하는 며느리가 안쓰럽다며 혀를 찰지 모르겠지만, 정작 아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습니다. 제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여보, 그래도 명절인데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명절 인사도 하고...”

“아니! 환자들은 휴일이 없어. 누군가는 자리를 지켜야지. 그리고 병원이 훨씬 마음 편해.


0.1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유니폼을 챙기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저는 묘한 해방감을 읽었습니다.


남들은 '명절 대피소'를 찾아 갖은 핑계를 만들어 낸다는데, 제 아내에게는 병원이 바로 그 단단한 성채였던 셈입니다.

며느리로서 전을 부치고 시어머니의 은근한 잔소리를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수십 번 울려대는 콜

벨 소리를 견디는 게 낫다는 그녀의 결연한 의지.


아내가 집을 나선 뒤, 고요해진 거실에서 저는 '간호사의 명절'이라는 그 치열하고도 평화로운 세계를 떠올려 봅니다.




인계가 끝났다. 스테이션은 평소보다 들뜬 분위기였다. 명절 연휴를 앞둔 일반 병동은 역설적으로 1년 중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한다.


급하지 않은 수술은 미뤄지고, 컨디션이 회복된 환자들은 하나둘 '명절 외박' 신청서를 쓰고 집으로 향했다.

텅 빈 병상들이 늘어날수록 우리들의 어깨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쌤, 이번 듀티 보셨어요? 다들 데이 하겠다고 가위바위보까지 할 기세였어요.”

동료인 김 간호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킥킥거렸다. 그녀는 이번 설에 '올 듀티'를 꿰찬 이번 시즌의 승리자였다.


“그러니깐요. 제사 지내고 하루 종일 허리 굽혀 전 부치는 것보다 수액 달고 차팅 하는 게 백배 생산적이죠. 게다가 휴일 수당까지 받잖아요. 시댁 가서 듣는 '아기 소식은 없니?'라는 말보다 환자들 클레임이 차라리 정신 건강에 이롭다니까요.

나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명절 기간의 병동은 완벽하게 격리된 '요새'다. 하지만 평화도 잠시, 스테이션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ER 이었다. 잠시 후, 초췌한 몰골의 박 간호사가 머리를 반쯤 풀어헤친 채 우리 병동으로 올라왔다.

박 간호사는 스테이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쌤들, 살려줘요... ER 지금 전쟁터예요.”

“박 쌤, 왜 그래? 명절이라 다들 쉬는 거 아니었어?”

우리는 내심 능청을 떨며 그녀를 맞이했다.


“아이고, 언니. 모르시는 말씀 마세요. 지금 동네 병원들 다 문 닫았잖아요. 평소 같으면 동네 의원 갈 사람들이 죄다 응급실로 밀려들어요. 아까는요, 세상에. 떡이 목에 걸린 할아버지가 실려 오셨는데, 온 가족이 뒤따라 들어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니까요?”

박 간호사는 그 상황이 떠오르는 듯 진저리를 쳤다.


할아버지는 급하게 떡국을 드시다 기도가 막히셨고, 아들은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라고 소리치고, 며느리는 '그러게 천천히 드시라고 했지 않냐'며 남편과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수라장도 그런 아수라장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명절에 ER이 풀 가동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명절의 민낯을 처음 본 모양이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뿐인가요? 전 부치다 기름 튀어서 화상 입은 아줌마, 술자리에서 싸우고 머리 깨져서 온 아저씨들까지... 정말 '종합 선물 세트'예요.”

박 간호사는 한숨을 내쉬지만, 동시에 약간의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요, 언니. 집에 안 가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해요. 어제 시어머니한테 전화 왔는데, 이번에 친척들 다 모인다고 음식 많이 해야 한다 더라고요. 응급실에서 떡 100개 뽑는 게 시댁에서 시조카들 세뱃돈 주며 웃어주는 것보다 마음은 편해요. 진짜로요!

그녀의 처절한 고백에 우리는 격하게 손뼉을 쳤다.


명절 연휴, 누군가는 가족의 정을 나누기 위해 모인다지만, 우리 간호사들은 그 '정'이라는 이름의 감정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병원을 택한다.

환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 명절 근무는 일종의 탈출이자 '당당한 회피'였다.


창밖으로 귀성길의 붉은 헤드라이트 행렬이 보였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시 환자들에게 향했다.

시댁 대신 환자에게 향하는 우리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하고 밝았다.




“오늘 ER 박 쌤이랑 수다 떨었는데 너무 웃겼어!”

밤을 새우고 이른 아침 퇴근한 아내의 손에는 병원에서 나눠준 작은 선물 세트와 야식으로 나눠준 컵라면이 들려 있었습니다.

피곤함이 역력한 눈가였지만, 마치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명절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배웁니다.

굳이 먼 길을 달려가 형식을 차리고 음식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지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돕고,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컵라면 국물이라도 나눠 마실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충분히 근사한 명절이 아닐까요.


내일부터 본격적인 설 연휴입니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구독자분들 중에는 고향으로 향하는 분도, 혹은 제 아내처럼 누군가를 위해 일터를 지키는 분도 계시겠지요.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목에 걸린 떡처럼 마음을 답답하게 막아서는 일 없이 술술 풀리는 평온한 시간이길 바랍니다.


구독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행복한 명절 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R: Emergency Room, 응급실.
(*)독립: 신규 간호사가 1~3개월의 교육을 마친 뒤 홀로 일하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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