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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Apr 03. 2018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이름

영화 <레이디 버드>

해당 글은 영화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브런치 무비 패스를 통해 관람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저마다의 이름을 부여받고, 그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 이름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살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기존의 이름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만들어 그에 따라 살아간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자기 자신을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이라고 소개하는 여고생. 왜 레이디 버드를 강조하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크리스틴은 대답한다. 그게 바로 진정한 내 이름이라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위해 지어 준 내 진짜 이름.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


영화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의 여정을 따른다. 새크라멘토에 사는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가 혐오스럽다. 사생활이라곤 없는 좁은 집과 그 집을 지배하는 가난이란 그림자. 그녀가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 자신의 출생지를 속이는 모습, 자신을 크리스틴이 아니라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달라고 꿋꿋이 주장하는 모습은, 누구나 겪었을, 겪고 있을, 겪게 될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특정 시기를 대변한다.


사춘기. 우리는 그 시기를 일반적으로 사춘기라 부른다. 사춘기라는 단어를 쓰면서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키보드를 몇 초만 두들기면 나오는 그 세 글자에 어찌 '레이디 버드'의 방황과 고뇌를 담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짙은 그림자를 '그땐 다들 그렇지, 뭐. 어렸으니까.'라고 말하는 무례를 나는 범하고 싶지 않다.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관계는 크리스틴과 그녀의 어머니 마리온이다. 영화 종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사건건 충돌을 빚는 모녀의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공감대를 형성케 한다. 언제나 딸이 최선의 모습이길 바라는 어머니와, 지금 이대로를 최선으로 받아들여주길 바라는 딸 사이의 갈등은 부모 자식 간 예외 없는 숙명과도 같은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피할 수 없는 시험을 치르며 한 때 '레이디 버드'이기를 주장하던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를 떠나는 일종의 '졸업'과 함께 결국 크리스틴으로 살아가길 택한다. 그녀의 어머니와 똑 닮은 모습으로 차를 몰며 자신에게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새크라멘토라는 고향을 부여한 한 여자의 감정을 어렴풋이 헤아려본다.



여전히 그들-크리스틴과 마리온-은 시험에 들 것이다. '너도 내 나이 되면 이해할 것'이라는 이 땅의 흔해 빠진 저주는, 안타깝게도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짐작해보는' 결말에 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극 중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고 처방을 내리는 마리온이, 떠나는 크리스틴을 끝내 배웅하지 못하고 눈물짓는 모습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나의 사춘기를 떠올리고, 앞으로도 꾸준히 서로를 시험에 들게 할 숙명과도 같은 그 관계를 떠올려 본다. 영화를 본 모든 관객이 그러기를 조심스레 바란다. 모든 자식은 어머니로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삶과 이름을 선물 받은 피해자이며, 동시에 그녀의 삶을 어머니로 만든 가해자이기 때문에. 이 깨지지 않는 계약의 대가는 시험에 맞서, 끊임없이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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