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커뮤니케이션
워킹데드라는 이름을 한 게임이 있습니다. 2012년 GOTY(올해의 게임) 타이틀을 받은 작품입니다. 게임은 단순합니다. 좀비사태 속 주인공 앞에 다양한 선택지가 나오고 플레이어는 그중 원하는 대사나 행동을 취하면 됩니다. 단순하지만 몹시 드라마틱합니다.
좀비에 물려 잠시 후면 (아마도) 좀비로 변할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며 괴물 같은 모습이 될 바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합니다. 플레이어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녀의 죽음을 돕기 위해 총을 줄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 끝에 총을 주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녀가 좀비로 변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생채기에 그칠 상처였다면? 나는 그녀를 죽인 겁니다. 그녀는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끔찍하게도,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총을 다시 가져가야만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처참한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게임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는 현실 속 보통의 하루입니다.
게임 워킹데드 속에서 플레이어는 좀비사태를 해결할 영웅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선택지들 중 최선의 길을 찾아 표류하는 한 인간일 뿐이지요.
우리는 하루에도 수차례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선택은 사후적인 노력일 뿐 개인은 사건이나 타인의 발생에 한없이 무력합니다. 일관된 태도를 견지해 나갈 수는 있지만, 일관된 관계가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저 내 앞에 놓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기약 없는 노력을 계속할 뿐입니다.
여기 새로운 갈림길 위에 두 남자가 있습니다. 설국열차에서 주인공 커티스는 기차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꼬리 칸에서 출발한 커티스 일행은 기차의 맨 앞인 엔진 칸을 향해 차례차례 문을 열고 나아갑니다. 그것이 과연 탈 경계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그저 경계를 오고가는, 요즘 흔히 말하는 통섭일지도 모릅니다. 다소 폭력적인 태도로 기차를 가로지른, 그래서 기차를 아우르지는 못한 실패한 통섭 말이지요.
커티스가 열차의 실체가 담긴 엔진 칸까지 단 하나의 문을 남겨둔 순간,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가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내가 진짜 열고 싶은 건 앞으로 가는 이 문이 아니야.
벽처럼 생각되어오던 열차 밖으로 나가는 바로 이 문이란 말이야.
설령 그 수단이 기차를 송두리째 박살낼 폭탄일 지라도요. 하지만 그 모든 경계를 깨부수고 기차 밖으로 내던져 졌을 때, 두 아이에 이어 북극곰 한 마리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진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생존을 위해 다시금 경계의 울타리를 칠 것입니다.
탈 경계는 불가능합니다. 경계는 필연적입니다. 너를 너라고 하는 이유는 너와 나를 구분 짓는 경계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인 걸요. 유토피아는 이상향임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뜻을 가집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찾아나서는 동력이 우리를 유토피아와 가장 근접한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신을 알기 위한 이 지극한 노력이 진심으로 당신께 닿을 것이라는 믿음이요. 우리가 할 일은 경계라는 우리 사이 한 줄 선을 인정하되 담을 낮추고 절벽을 메우는 일, 나를 온전히 내보이고 당신을 온전히 품어 안을 정성과 노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닿을 수 없을 지라도 닿음을 지향하는 행위, 경계를 극복한 소통이라는 이름의 유토피아는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