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약속할 수 있는 용기

현대사회에서 지순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한가

by StoA

여기 천하제일의 미술품 감별사가 있다. 예술품을 바라보는 그의 날카로운 안목과 깊은 통찰력은 그에게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온갖 고 미술품이 가득한 대저택을 상속받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 홀로 저택을 지키고 사는 외로운 여성. 형언하기 힘든 매력을 품은 그녀의 등장 이후로 남자 주인공의 시선은 그가 지금껏 감정해 오던 미술품이 아닌 이 외로운 여인에게 정박한다.


영화 <베스트 오퍼> 2013.


2013년 개봉한 영화 <베스트 오퍼>의 줄거리이다. 영화의 결론을 밝히자면, 이 여자의 사랑은 가짜였다. 주인공이 모아온 값비싼 미술품과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 하에 접근한 사기꾼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모아 온 작품과 재산이 모두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망연자실한다.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남성에게 불현듯 찾아온 지순한 사랑의 불씨, 하지만 그것은 지순한 사랑을 약속한 상대의 일방적 계약 파기에 의해 한 줌 재처럼 사라진다.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약속에 대해 흔들림 없는 믿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지순한 사랑은 우리에게 너무도 비현실적인, 잔인한 맹신을 요구한다.


영화 <베스트 오퍼>는 이야기한다.
최고의 미술품 감정사마저도, 사람의 마음은 감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사건적인 시간, 약속으로서의 시간이 품은 가장 큰 특성은 그것이 시간의 낙차를 허락한다는 점이다. 약속으로 결속된 사건은 영원성을 표상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시간의 정지를 뜻한다. 하지만 그 사건 바깥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 권혁웅, <몬스터 멜랑콜리아> 35쪽


<몬스터 멜랑콜리아(권혁웅 지음)>라는 책의 도움을 받아 지순한 사랑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책은 세계의 다양한 괴물들을 통해서 사랑의 논리를 짚어 나간다. 그 중 ‘약속’ 장에서는 제 꼬리를 입에 문 뱀, 우로보로스를 소개한다.


우로보로스(Ouroboros)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문장에 흔히 등장하는 제 꼬리를 입에 문 뱀이다. 스스로를 먹고 스스로 자라나므로 우로보로스는 영원과 불멸을 상징하는 동물로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상징이 되었다. (중략), 우로보르스는 제 몸으로 제 몸에 삽입하고 제 몸으로 제 몸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남녀 양성의 완전체다. 그것은 스스로 낳고 자라고 죽고 다시 태어나므로 깨지지 않는 약속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세상을 온전히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영원한 사랑이다.

- 권혁웅, <몬스터 멜랑콜리아> 41쪽
969feba0096d93b86481361de0f8ca27.jpg 우로보로스(Ouroboros)

우리가 타인을 사랑할 때,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해 지순함을 약속할 때, 우리는 미래의 시간을 현재에 가져와 영원히 순환케 한다. 자기 꼬리를 입에 문 이 뱀은 이제 반지의 형상이 되어 지순한 사랑의 상징이 된다. 그러나 물신화된 약속은 영원성을 표상할 뿐 영원성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멈춰버린 약속 내부의 시간과 변함없이 흘러가는 약속 외부의 시간, 이 둘 사이의 낙차는 언제든지 파기 가능한 약속의 무상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나 현대사회에서 지순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까닭도 이러한 불안정성에 기초한다. 현대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약속하지 못하게 하는 불확실성의 사회이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근대사회의 모습을 액체 사회라고 이름 붙인다. 우리 시대 세계의 질서와 제도가 고체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유동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생각이다. 액체가 갖는 유동성은 후기 근대의 불확실한 삶을 가리키는 것이자, 동시에 현대인의 공포와 결부된다.


우리들의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늘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내일은 전혀 쓸 데 없고 괴상하거나 유감스러운 실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그래서 우리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계처럼 그 집의 거주자이자 때로는 설계자이며, 행위자이자 사용자이고 희생자이기도 한 우리 자신들도 끊임없이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잘 감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최근에 유행하는 단어인 ‘플렉서블flexible’이 암시하듯이 ‘유연한’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17쪽.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그의 개념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불확실성, 가변성, 유동성 등을 바탕으로 한 액체 사회이다. 현대인의 논리와 이성적 근거가 탄탄해질수록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사회가 가진 불안정성을 실감한다. 이런 사회에서 '약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지순한 사랑은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자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석음의 산물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현대 사회에서 지순한 사랑의 가치를 찾고자 한다. 그리고 예술과 문학으로부터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을 해체하기 위해 사회학이 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면, 문학과 예술은 그것에 내재한 불온함을 기반으로 삶과 사회의 비루한 일면을 지적해 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 문학이 급격히 영향력을 잃어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중략), 나는 한국에서는 문학의 역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치운동이 사라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학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중 일부


비록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사회적 변혁을 이끌어오던 근대 문학의 역할이 사실상 끝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일부 틀렸다는 것을 2016년 겨울 대한민국 사회가 매주 광화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약속하지 못하는 사회와 책임지지 못하는 정부를 꾸짖고 이를 바꾸기 위해 학생이, 노동자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광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문화 예술계는 후원금을 받아 영화를 개봉하고, 배우와 가수들은 연기하고 노래하고, 소설가와 시인들은 글을 쓰고,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이를 공유하고 사회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과 풍자를 새롭게 만들어 내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이 감히 종언을 내린 근대 문학은 그 형식과 표현을 현대 사회에 걸맞게 바꾸었을 뿐이다. 나는 변함없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지순한 사랑에서 비롯한) 문학과 예술의 불온한 선동성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촛불집회3.jpg 2016년 겨울, 대한민국.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사랑한다. 그 여덟 글자가 가진 무모함과 상상력을 사랑한다. 신의와 유대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 공동체는 붕괴되고, 맹목적 사랑을 강요해 오던 각종 이데올로기가 해체되면서 지순한 사랑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어딘가에는 지순한 사랑이 발생하고 유지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이 땅에서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될 지라도 누군가의 글과 노랫말에는 지순한 사랑의 정신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예술의 가치, 인류애의 가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감히 약속할 수 있는 용기. 시공간을 초월한 지순한 사랑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는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이것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시급한 과제들이다. 이전의 문학은 이런 과제들을 상상력으로 떠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이 이것을 떠맡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불만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것을 떠맡고 싶다. 그것이 문학적이든 비문학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 2006년 3월, 가라타니 고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