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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Jan 25. 2017

피아노를 치는 여자

고집스럽고 서투른 당신

<글쓰기개론 3주차. 피아노를 치는 여자를 주제로 쓴 글입니다>


K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나 또 면접 떨어졌어."

"그러게 내가 얘기했지. 너랑 은행은 안 어울린다고."

"됐고 커피나 마시자."


항상 이런 식이다. 최근 K와의 대화는 단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취업이라는 문턱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고 마는 K의 신세한탄형,

그리고 날씨 얘기 같은 시시콜콜한 화제 전환형.

하지만 아무리 화제 전환을 해보아도 결국은 신세한탄으로 끝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랄까.


"앞 집에 여자가 이사를 왔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카페라떼를 홀짝거리던 K의 눈이 동그래진다.

"진짜? 얼굴은 봤어? 한 번 잘해보지 그래.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나오잖아. 이런 게 다 지순한 사랑의 시작이라고."

K가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는 걸 보니 나름 성공적인 시도였던 것 같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속으로 숨기며 나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얼굴은 못 봤어. 얘기만 들었는 걸."

"뭐야, 그럼 그게 다야?"

"매일 아침 피아노를 쳐."


매일 아침 피아노를 치는 여자. 분명 그것은 내게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K가 이야기한 것처럼 지순한 사랑의 불꽃이 튀는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매일 아침 피아노를 치는 누군가의 일과에 맞추어

나 역시 의자에 기대앉아 그 소리를 감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점.

그전까지만 해도 그 시간에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이건 제법 큰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K와 나는 한동안 피아노 치는 여자와 그녀가 연주하는 곡, 그리고 K가 좋아하는 노래까지

수차례 이야기를 변주해나가다 늦은 밤이 돼서야 헤어졌다.

다음번 면접은 꼭 통과할 거라는 위로의 말과 함께.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고 나는 예정보다 일찍 의자에 앉아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시작을 기다리는 팬의 심정이 이런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연주가 시작된다.


그녀의 연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연주를 틀리거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장 멈춰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점.

그래서 그녀의 연주는 두세 곡 밖에 되지 않음에도 한 시간을 꼬박 채운다.

나는 그 서투르면서도 고집스러운, 고독한 예술가 같은 태도에 감탄을 마지않으며

채워지지 않은 그녀의 남은 부분을 내 욕망과 상상에 맡겨본다.


새까만 머리카락. 거기에 대조되는 하얀 손가락. 지긋이 감은 두 눈. 긴 속눈썹.

피아노 위에는 무늬 없는 머그잔. 거기에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카페라떼.

그렇게 나의 은밀한 상상력을 뽐내다 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차, 오늘은 K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다.

이번에는 K가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 주기를.




나는 예정보다 일찍 카페에 도착해 K를 기다린다.

이쯤 하면 올 때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란 듯이 카페 문이 열린다.

K는 카운터에서 카페라떼를 주문하고 내 맞은편에 앉는다.


나는 테이블 위 K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보다가 묻는다.

"K, 혹시 피아노 친 적 있어?"

"갑자기 그건 왜? 너 그 앞 집에 이사 왔다는 여자한테 꽂혔구나?"


아니, 그건 전혀 아니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만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 드디어 면접 붙었다고."

"정말? 이제 은행원 되는 거야?"

"아직 몰라. 최종 면접이 남았거든."


K는 그렇게 말해 놓고도 기쁨을 숨길 수 없다는 듯이 활짝 웃는다.

아무래도 좋다. 나는 피아노를 치는 여자, 이 고집스럽고 서투른 그대의 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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