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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Mar 29. 2020

버스 운전사

 누구나 하나쯤 잊지 못할 버스가 있다. 희서에게는 그것이 9001번 버스였다. 집에서 회사까지, 다시 회사에서 집까지, 오르고 내리는 일을 수년간 반복해 온 버스. 서울 강남역, 저녁 7시 40분. 여느 때처럼 희서는 9001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네, 어서 오세요..."

 유별난 운전사라고 생각했다. 오르는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것은 장거리 노선을 운행하는 버스기사에게 득 보다 실이 많음이 분명해 보였다. 새로 일을 시작한 기사인가 보다, 도로 위에 산재한 온갖 쓴 맛을 보고 나면 저 혈기도 얼마 못 가 희석되고 말겠지. 희서는 제법 예의를 갖춘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기사의 인사에 정중히 응하면서도 비관적 전망을 거두지 않았다.

 바퀴 쪽 창가 자리. 희서는 습관처럼 그 자리에 앉았다. 대중적 선호도가 높지 않음에도 희서는 언제나 그곳을 으뜸으로 꼽았다. 바퀴와 차량 배터리가 위치하는 버스 구조상 툭 튀어나온 발판이 사람들의 불편을 자아내곤 했지만, 오히려 그러한 비호가 그 자리를 언제나 빈자리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남겨진 자리는 언제나 희서의 차지가 되었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바퀴의 규칙적 소음이 주변의 산만함을 가리는 완충제가 되어주었고, 집까지 남은 한 시간 동안 희서는 그 속에서 눈을 붙이고 쉬어 갈 계획이었다. 버스는 희서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뒤늦게 출발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희서의 숙면은 얼마 가지 못했다. 타는 사람과 내리는 사람 모두에게 건네는 기사의 과잉스러운 친절. 희서는 흐트러진 머리를 고쳐 넘기고 안경을 올려 썼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 쪽을 쳐다보는 와중에도 기사의 기행은 계속됐다. 차선을 바꿀 때마다 기사는 창 밖으로 일일이 손을 뻗어 뒷 차에게 양해를 구했고, 많은 차량이 그러하듯 수신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기사는 옅은 웃음과 함께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손님에게 한껏 상냥한 인사를 건넸고, 몇몇의 손님들은 그에 상응하는 호응을 보내왔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내릴 때가 되자 기사는 '어르신, 앞으로 내리세요. 앞으로.'라며 가까운 앞문을 열어주었고, 노인이 천천히 하차를 마치고 나서야 새로운 손님을 받았다. 혹시나 기다리던 사람들이 불편을 느꼈진 않았을까 더 큰 목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출발하겠습니다."

 종일 냉소적이었던 희서의 마음에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희서가 주변을 둘러보니 버스에 탄 다른 사람들도 그녀와 같은 마음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딘가 들뜬 듯한 모양새였고 적당히 리듬을 타는 듯한 고개의 끄덕거림, 심지어 스마트폰을 만지는 손가락의 움직임마저 묘하게 경쾌해 보였다. 어색한 풍경에 감각이 곤두섰던 희서는 이내 모든 경계를 풀고 버스 안의 보이지 않는 리듬과 운율에 몸을 실었다. 긴장이 풀린 희서가 다시, 잠에 들었다.

 '참 별난 운전사네.'

 

  눈을 떴을 때, 버스 안은 잠들기 전보다 한 꺼풀 어두워져 있었다. 어디쯤 왔는지 창 밖을 보려던 희서는,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와 함께 그녀가 쓰고 있던 안경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희서의 주변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고 저 멀리 운전석에 기사의 뒷모습만 흐릿하게 자리했다. 부산했던 버스는 소름 끼치도록 조용했고 덜덜거리는 바퀴 소음과 창 밖에 스치는 불빛들만이 버스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희서의 종점은 공영차고지로, 버스의 종점과 같았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본능적 직감과 급변한 환경이 주는 긴장감 속에서 희서는 다급히 안경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무지 안경을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희서의 눈에 들어온 것은 희서 쪽 자리의 발판이 끝나는 지점, 버스 배터리와 인접한 좁은 틈새였다. 쓰고 있던 안경이 어쩌다 흘러내렸다면 자연스럽게 떨어졌음직한 공간. 희서가 미간을 찌푸려 아래를 응시하니,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오는 듯싶었다. 손을 집어넣으려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좁고 굴곡진 간격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희서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여기 안경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실례가 안된다면 같이 찾아주시겠어요?'

 결국 희서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지랖 넓은 운전사가 곤란에 처한 희서를 먼저 발견해서 뭐라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희서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치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버스가 멈춰 섰다.


 "손님, 종점입니다. 내리세요."

 희서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회가 지금 뿐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숨 막힐 듯 무거운 공기가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버스의 뒷문은 열리지 않았다. 희서는 대신 운전석의 칸막이가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희서보다 키가 세 뼘은 더 커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그곳에서 나왔다. 희서가 온 힘을 다해 남자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려 했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렸다. 다가오는 운전사 쪽으로 빛이 작게 산란했지만, 그것이 허리춤의 벨트인지, 손에 든 날카로운 무언간지, 그것도 아니면 찾을 수 없었던 희서의 안경인지, 희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희서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흉흉한 소문과 진실 속에 9001번 버스는 폐선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똑같은 노선을 달리는 버스가, 번호의 자릿수만 바뀐 채 운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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