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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A Feb 04. 2020

김영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학

 눈을 뜨자 새까만 어둠이었다. 눈을 떴으니 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영의 자연스런 움직임은 그를 감싼 사방의 벽에 의해 가로막혔다.

 '뭐야, 시발. 가위인가.'

 평소 가위에 종종 눌려본 영이었다. 이럴 때는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자유로운 손 끝과 발 끝서부터 조금씩 감각을 깨워나가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영은 지금의 상황이 평소의 가위와는 다르단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시각이 차단된 칠흑 속에서 나머지 감각들 모두가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우선, 가위에 눌린 것 치고는 몸을 움직이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다만 그 자유로운 움직임이 곧장 벽을 닮은 어떤 물리적 실체에 막혀 작은 꿈틀거림으로 종결될 뿐이었다. 영이 곧장 손마디를 뻗어 (얼마 못 가 벽에 가로막혔지만) 그 표면을 만져 봤을 때, 꺼슬꺼슬한 촉감과 함께 고운 분진이 손 끝에 남았다. 코에 스치는 큼큼한 흙냄새와 어딘가 꽉 막혀 먹먹한 귓가의 감각. 흔들림 없는 고요한 정적, 그리고 어둠. 모든 것이 영으로 하여금 그가 관 속에 고이 누워 땅 아래 어딘가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중학생 때 이미 백 팔십이 넘었던 그의 키에 딱 맞추어 제작된 나무 관. 그 속에 영.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영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평소 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낯 뜨거운 애원이 나오는 모습을 쉽게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영은 아직 죽음을 경험하기엔, 아니 죽음을 상상해 볼 기회조차 드물었을 고등학생이고, 지금 그의 처지는 땅 위에서 누려오던 모든 체면과 권위를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원초적인 생의 외침에 응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은 도움을 청하는 행동이 무용한 것임을, 도리어 밀폐된 공간의 산소만 축냄으로써 죽음에 더욱 가까워질 뿐이라는 것을 호흡이 가빠오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어떻게든 관을 깨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봤지만 비좁은 자리와 고정된 자세로는 도무지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일전에 체육관에서 킥복싱을 배워 친구들을 상대로 우쭐거리던 영이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한정된 나무 관 안에서 공들여 키운 근육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영은 궁여지책으로 자기 앞의 나무 벽을 벅벅 긁어대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 모습의 단면을 볼 수 있다면, 마치 앞사람의 등짝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자세임이 분명했다. 팔도 채 쭉 뻗지 못하고 손 끝에만 힘을 실은 채 벅벅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부릅뜬 두 눈. 핏발이 선 야수의 눈동자.


 손 끝이 축축해지고 아려오기 시작했다. 영의 몸은 어느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지만 그는 벽을 파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뭇결이 일어나 손톱 아래 연약한 살을 파고들었고,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그의 손 끝에 끈적한 핏물이 맺혀가고 있음은 자명했다. 살아야 한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가뒀는지, 왜 애꿎은 내게 이런 시련이 주어지는지, 밝혀야 한다. 곤경에 내모는 것은 타인의 몫이고, 살고자 애씀은 본인의 몫이라니. 그 불평등한 관계를 상상하자 영은 조금 서러워졌다. 흐르는 땀이 뜬 눈 사이로 스며들었고 영은 얼굴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그저 젖은 수건의 물기를 짜내듯 두 눈만 크게 깜박거렸다.


 벽을 파내는 와중 영은 지난 기억들을 떠올렸다. 영은 고등학생이고 기숙사에 살았다. 친구들을 골탕 먹일 때도 있었지만 고등학생이라면 다들 한 번씩 해봤음직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아, 갖고 싶었던 시계를 훔쳐놓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시계를 훔친 범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인가 사람을 때린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마땅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러했다. 나약하고 빌어먹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가 없는 짐승들. 그런 놈들은 맞아도 싸.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누가, 장난을 쳐도 이런 장난을,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는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사소한 일로 말싸움이 잦던 룸메이트 민인가? 만만한 모습에 잔심부름을 시키곤 했던 현? 아니면 누구?


 영은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작은 소리가, 하지만 영이 눈을 뜬 이후로 한 번도 듣지 못한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일순 멈췄다.


 "김영, 내 목소리 들려?"

 저 멀리 속삭이듯 목소리 하나가 들린다. 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잠깐 멈췄다가 대답했다.

 "누, 누구야? 들려, 들리니까. 나 여깄어. 살려줘."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는구나?"

 영은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당황했다.

 "뭐야. 민이야? 아니야. 현이구나. 그렇지? 내가 미안해, 다 미안해. 나 좀 살려줘. 제발."

 "내가 누군줄 알고 살려달라 마라야?"

 마치 장난을 치는 듯한 말투.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영은 실낱같던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다.

 "뭐? 씨발. 야, 당장 꺼내. 개새끼야. 네가 누구든 간에 내가 여기 나가면 너는 뒤졌어. 어? 씨발. 야!"

 "..."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영의 두 눈에서 끈끈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영 본인도 눈물이 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다시 덜덜 떨리는 두 손, 열 손가락, 아니 이제는 열 손가락이 성히 붙어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손마디로 벽을 파내기 시작한다. 영의 헐떡이는 숨과 거친 마찰음, 나무 바스러지는 소리만이 관 속에 울려 퍼진다.


 들짐승 같았던 두 눈도 어느새 감기고 헛손질을 계속하던 영은 목을 타고 어떤 이물질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것을 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는 어딘가 거칠고 불연속적인 감각이었다. 모래시계 윗단에 쌓인 모래가 작은 틈새를 비비고 들어와 밑단을 채우듯, 영을 둘러싼 관벽이 그가 낸 균열을 통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새어드는 한 줄기 달빛이 영의 눈을 간지럽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영은 땅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마지막 힘을 다해 뒤집어쓴 흙을 헤집고 기어 나와 쓰러지던 본인.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밖은 여전히 어두운 새벽이었다.


 "이제 일어났냐?"

  익숙한 목소리였다. 땅 아래에서 영이 들었던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영은 대답할 기운이 없다.


 "이래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겠니?"

 "뭐?"

 "네가 그랬잖아. 나와서 죽여버리겠다고. 지 이름도 기억 못 하면서 무슨."

 영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김영이라고 너를 불렀을 때 네가 대답했잖아. 김영, 그건 이름 없는 영혼을 부르는 말이야. 아무 성씨에 영 자를 붙인 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니? 너, 죽었어. 한참 전에. 땅 속에서 눈을 떴을 때 이미 죽어 있던 거야. 그것도 모르고 살아보려 발버둥치는 꼴이란."
 "넌 뭐야. 그래서, 네가 날 죽인 거야?"
 "자신의 사인을 밝히는 건 본인의 몫이야, 김영.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내는 게 상도에 맞지 않겠어? 하지만 어려울 거야. 기억하지 못하겠지. 대부분의 가해자가 그런 식이거든. 본인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왜 타인의 원한을 사서,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는지, 의식이라곤 없어. 네가 언제부터 김영이었니? 내 이름은 알겠고? ... 거봐, 모르겠지. 항상 그래왔으니까."


 "누구야, 넌?"

 "기억해 내, 김영. 제일 먼저 잃어버린 네 이름, 그리고 네가 잊어버린 숱한 이름들까지, 전부 다. 그러고 나서 그 김영이라는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줘 버려. 네 것이 아닌 이름에 정박되어 구천을 떠돌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그게 가해자의 숙명이거든. 이름을 되찾아서 지난 업보를 모두 짊어지라고, 김영. 덕분에 나는 간다. 그럼, 안녕."


 영의 주변에는 더이상 무엇도 없었다. 도움을 청하는 영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눈을 감아도, 떠봐도, 여전히 어두운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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