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었다. 저 멀리 가로등 조명 아래 네가 있었다. 몇 년만에 만난 너라서 반가웠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 너는 울고 있었다. 너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운 적이 없었다. 그럼 이건 뭐지.
아, 꿈이었지. 하지만 꿈이라해서 생전 보지 않은 것을 꿈 꿀 수 있나? 티비나 영화에서 다른 사람 우는 건 많이 봤어도 네가 우는 걸 본 적은 없다. 분명하다. 그러면 저건 다른 사람 몸에 너의 얼굴을 붙여 놓은 걸 테다. 어쩐지 얼굴을 들지 않는다. 너는 믿어주지 않아 서럽다는 듯 더 큰 소리로 운다. 웅웅. 우는 사이에도 어딘가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난다. 의심받기 시작한 꿈은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검은 장막이 쳐지고 감각이 아득해진다.
불이 난 극장을 빠져나가듯 어수선하게 잠에서 깬다. 눈을 질끈 감고 간밤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울고 있는 네가 있었다. 울고 있는 네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가증스럽다. 역겨운 나의 두뇌.
목이 탄다. 자고 나면 언제나 갈증이 찾아 온다. 신선한 것을 찾으려는 본능같은 걸까. 그래, 너도 이제 해묵은 소재가 되어버렸구나. 냉장고 앞에 서서 나는 잠시 어지러움을 느낀다. 뭘까, 이 불편한 감정. 마치 집안 한 구석 먼지 쌓인 상자 속에서 토막 난 너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
내가 너에게 이별을 통보한 지 얼마 안가서의 일이다. 너는 비교적 생생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모두가 잠든 새벽,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내 베겟맡에 앉아있던 너의 환영. 나는 어색하게 웃음짓는 너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죽어줘, 제발, 부탁이야. 이내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상자를 가져와 발버둥 치는 너를 억지로 구겨 넣었으리라.
그렇게 너를 잊어갈 무렵, 나는 냉장고 앞에서 다시금 너를 떠올린다. 이제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 그것이 너라는 건 오직 나만이 안다. 품에 안을 수도, 밖에 내다 버리지도 못하는 너의 기억. 나는 그것을 다시금 방 한 구석 손 닿지 않을 곳 저 멀리 치워둘 수밖에 없다. 오래된 기억이라는 이름표를 겉에다 붙여 놓는다. 꺼내 달라고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머리를 때린다. 속이 울렁거린다.
괜찮다,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한동안 너를 생각할 때면 왼쪽 손바닥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바닥 중앙을 누군가 바늘로 찌르고 있다. 아마 너겠지. 병원에 가면 의사는 말했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신경쓰실수록 통증이 심해지는 겁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 아픈 것도 더이상 없고 이제 나만 잘 살면 돼. 잊자, 잊어. 나는 모른 척 냉장고 문을 연다.
퉁, 데구르르. 굴러 떨어지는 머리 하나.
"그러게 왜 나를 죽였어?"
"죽인 적 없어."
"거짓말 하지 마. 그럼 내가 왜 여기 있는 건데?"
너는 냉장고 속에 있다. 차갑게, 옛날 모습 그대로. 도저히 썩지 않을 것처럼 집요하게 나를 쫓는다. 조심스레 너를 안아 들어 냉장고 야채실 안에 넣는다. 야채실 안에는 사람 머리만한 수박 하나.
웅웅- 거리며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사람 우는 소리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