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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Jul 08. 2015

M

스크린에 씌어진 시

이명세 감독의 <M>은 소설가 한민우의 내면세계를 꿈과 현실의 넘나듦을 통해 오관(五官)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표현으로 풀어 낸 수작이다. 압축되고 단절된 이미지들과 그 이미지들의 사이를 유려하게 메우고 있는 대사들. 그것들의 총체적인 결합이 낳는 미감(美感)은 한 편의 시를 감상하며 얻을 수 있는 그것과 다름없었다.
“Less poetic more specific”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아마도 이명세 감독이 추구하는 영화관을 뒤집어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Less specific more poetic” 이명세 감독 영화에는 서사가 없다는 비판에 대한 답이 충분히 되지 않을까?
이 영화를 한 편의 시로 감상한 자의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행간의 의미를 살려 전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려 한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의 의견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 주시길 바란다.


욕망화된 자아, 한민우

소설가 한민우(강동원 분). 그는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게다가 아주 부유한 집안의 딸인 은혜(공효진 분)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겉으로만 보기엔 그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고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다니며 엿보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며 불면증을 앓고 있고, 선인세까지 두둑하게 챙긴 소설을 한 글자도 써내지 못하고 있다.

이쯤에서 한민우를 다시 살펴보자. 그는 사춘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인한 가난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가난 때문에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되고 그로 인해 첫사랑인 미미(이연희 분)와도 안타까운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가난의 족쇄는 현재까지도 그를 옭아매고 있어서 그는 돈이 급해 사채까지 끌어다 쓰는 어머니의 짐을 고스란히 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소설쓰기와 결혼은 욕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는 행위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욕망을 좇아 살아가는 자신에 대해 구토를 일으킬 만큼의 혐오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소설을 ‘쓰레기’라고 부른다. 자신의 오관(五官)이 믿지 못하는,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돈을 벌기 위해 쏟아내는 스스로를 경멸한다. 결혼 또한 마찬가지다. 은혜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사랑이 읽히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는 여인과의 결혼. 진실하지는 않지만, 그것 또한 그의 욕망을 채워 주는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욕망을 좇아 살아가며 점점 속물이 되어 가는 그에게 잠재되어 있던 양심이 말을 걸어온다. 그 양심은 그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첫사랑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때의 순수했던 자신을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를 쫓고 지켜본다. 그 응시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진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하고 만다.


루팡과 일식집, 양면적 공간성

루팡. 한민우가 마치 꿈을 꾸듯 이끌려 도착한 곳으로, 첫사랑인 미미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왜 그 바(bar)의 이름은 루팡일까? 알다시피 루팡은 도둑이면서 신사인 두 개의 자아를 조화롭게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 존재의 상징처럼, 루팡이라는 공간에서 한민우의 현실적 자아와 순수한 자아가 서로 만나게 된다. 이 공간은 그 곳과 이어진 골목길처럼 깊숙하고, 괴도(怪盜) 루팡처럼 은밀한 한민우의 무의식의 세계를 표상한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의 꿈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공간인 것이다. 그 곳에서 그는 드디어 막혔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게 된다. 순수한 자아를 만나 진실한 이야기를 쏟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일식집은 현실 속의 공간이고, 그 안에서는 진실하지 않은 속물적 이야기가 오고간다. 그 공간에서는 ‘편집자-장인-편집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그 만남 속의 대사는 동일하다. 처음에 편집자가 한 대사를 장인이 반복하고, 마지막으로 그 대사를 한민우가 되풀이하고 있다. 이를 통해 속물적인 일상이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알 수 있다. 한민우는 그러한 현실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낸다. 하지만 후에는 자신이 그러한 대사를 되풀이함으로써 그 또한 그런 현실 세계의 일원이 되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양면적인 공간성의 설정을 통해 꿈과 현실, 순수한 세계와 속물적 세계가 잘 대비되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민우의 심리는 커피숍 앞 거리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몽롱하고 어지럽다.


되찾은 기억, 상처의 확인

동창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민우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마주치고, 그를 쫓아다니는 시선의 주인공 미미가 자신이 잊고 있었던 11년 전 헤어진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장 순수했던 시절에 만난 그의 첫사랑. 그는 미미에게 이별의 인사도 전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게 되었고, 혼자 남겨진 미미는 동창들에게 ‘무서운’ 아이로 기억될 만큼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8월 20일에 그는 미미를 만나려고 한다. 그들은 고통의 시간만큼 더 반가운 재회를 기대했지만, 비가 많이 내리던 그 날 미미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처럼 비극적인 미미의 죽음과 함께 그의 순수함은 잊고 싶은, 그래서 잊었다고 믿어 버린 기억으로서 무의식의 세계 속에 봉인(封印)된 것이다. 세월이 지나 욕망을 좇아 속물이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무의식 속의 그 순수한 자아가 봉인을 뜯고 그에게 말을 걸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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