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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Mar 01. 2016

동주

시(詩)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필리버스터에서 ‘시 읽어 주는 남자’가 화제다. 1984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이학영 의원은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낭송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또 중간중간 김남주 시인의 ‘진혼가’와 ‘잿더미’, 김지하 시인의 ‘1974년 1월’과 ‘타는 목마름으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당나귀 선거’, 슐레지엔의 ‘직조공’ 등의 시를 읊었는데, 모두 부당한 권력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꺾이던 세태에 반응하던 감성의 소리를 담고 있는 것들이다. 시들의 큰 울림은 10시간이 넘는 발언 시간, 텅 빈 국회의 여백을 메우기에 충분했다. 시대를 초월하여 일상에 무뎌진 이들에게 생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시의 힘이 절실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에는 시의 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한 편의 시는 개인의 감정을 되살려 내면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렇게 변한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주(강하늘 분)의 믿음은 문학을 혁명의 도구로 여겼던 송몽규(박정민 분)의 거침없는 행동과 대비되며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일면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미 시인 윤동주의 삶을 살펴본 적이 있다. 국어 시험에서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 현대시 영역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주요 작가의 일대기를 알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시인이 처한 환경과 시인의 행동들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의 작품 속 시구 하나하나를 해석해 낼 수 있어야 시험 문제를 잘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밑줄 치며 외웠던 동주의 일생에서는 작가로서의 시기와 질투, 배우고 시 쓰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식인의 부끄러움, 평생을 도망 다니며 자기 시집을 출간하지 못했던 유랑민의 마음, 연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아쉬운 청춘 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 ‘동주’는 우리가 다 아는 윤동주의 일생을 다루고 있었지만, 새로웠고 의미 있었다.


그리고 영화는 커다란 생각거리 하나를 던졌다. 부당한 현실을 바꾸는 힘에 관한 것이다. 몽규처럼 확실한 이념으로 무장하고 목표를 위해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인 것일까? 동주처럼 시대를 노래하고 아픔을 고백하는 시를 쓰는 것은 나약한 감상주의자의 현실 도피일 뿐인가? 이는 비단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만이 겪어야 했던 갈등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고민이니까.


대학 신입생일 때, 주변에 운동권 선배들이 수두룩했다. 뉴스에 등장하는 단체들에 소속된 선배들은 또래로 보기에는 어색할 정도로 경직된 모습이었다. 술자리에서의 이야기에서도 이념이 강조되었다. 백골단들이 살벌했던 시위 현장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중 일부는 체포되어 얼굴 보기가 힘든 적이 많았다. 그런 선배들에게 나는 의식 없는 날라리였다. 미제 제국주의자들의 음악에 빠져 지내며 대의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팝 음악은 좋아해서 들었고, 시위 현장에 나서지 않은 것은 확신이 없어서였다. 무언가에 나를 온전히 바치려면 그 일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고 지금도 믿는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일이 아닌데도 선배들의 지적과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서 억지로 끌려 나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조용히 공부하고 음악 속에 빠져 지냈다. 이기적인 겁쟁이인 채로. 졸업을 하고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미제 제국주의 음악의 유해함을 지적하던 선배는 팝 칼럼니스트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덜 부끄러워할 걸 그랬다. 그리고 그 선배는 좀 더 유연하게 우리들을 대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동주가 시를 사랑하는 것처럼, 몽규는 세상을 사랑한 거라고. 우리 서로 그렇게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걸 그랬다.


작년 민중총궐기대회 때 일이다. ‘민중’이니 ‘총궐기’니 하는 이념적 어휘들에 거부감을 느끼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운동권들의 80년대 시위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었다. 가족 단위들도 함께 어울리며 행사의 취지를 나눌 수 있는 문화제의 성격으로 변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세상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각자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된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모으고 발전시켜서 커다란 힘으로 키워 세상을 바꿔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는 시대의 움직임에 맞춰 영화 ‘동주’는 윤동주 시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다. 시를 통해 부당한 현실 속에서 개인들이 억압되고 체념해 버린 감정들을 되살릴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풍부하게 다져진 내면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윤동주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본이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걸 보면, 그 믿음의 힘은 무척 강하다.


식민지의 국어 시간
                                                      문병란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20리를 걸어서 다니던 소학교
나는 국어 시간에
우리말 아닌 일본말,
우리 조상이 아닌 천황을 배웠다.

신사 참배를 가던 날
신작로 위엔 무슨 바람이 불었던가,
일본말을 배워야 출세한다고
일본놈에게 붙어야 잘 산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조상도 조국도 몰랐던 우리,
말도 글도 성(姓)까지도 죄다 빼앗겼던 우리,
히노마루 앞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 앞에서
조센징의 새끼는 항상 기타나이가 되었다.
어쩌다 조선말을 쓴 날
호되게 뺨을 맞은
나는 더러운 조센징,
뺨을 때린 하야시 센세이는
왜 나더러 일본놈이 되라고 했을까.

다시 찾은 국어 시간,
그날의 억울한 눈물은 마르지 않았는데
다시 나는 영어를 배웠다.
혀가 꼬부라지고 헛김이 새는 나의 발음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누가 내 귀에 속삭였던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
나는 국어 선생이 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간다는 한글,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는 좋은 글,
나는 배고픈 언문 선생이 되었다.
지금은 하야시 센세이도 없고
뺨 맞은 조센징 새끼의 눈물도 없는데
윤동주를 외우며 이육사를 외우며
나는 또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가.

어릴 적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일본말,
그날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는데
다시 내 곁에 앉아 있는 일본어 선생,
내 곁에 뽐내고 있는 영어 선생,
어찌하여 나는 좀 부끄러워야 하는가.

누군가 영어를 배워야 출세한다고
내 귀에 가만히 속삭이는데
까아만 칠판에 써놓은
윤동주의 서시(序詩)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글자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 슬픈 국어 시간이여.


삼일절 아침에 본 영화 ‘동주’는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식민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 개인들은 분열되고 스스로의 살 길만을 염치없이 찾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가슴속에 새기며 살고 있는가? 스크린 속의 동주와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악수를 나누며 그렇게 나의 감정들은 하나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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