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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Feb 27. 2016

귀향

모두를 위한 진혼굿

'화냥년'이라는 말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하고,  전쟁에 패배한 조선의 수많은 여인들은 속절없이 청나라로 끌려가야 했다. 끌려간 여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조선으로 귀향하게 되는데, 그녀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환대받지 못했다. 청나라 군사에 의해 겁탈을 당하거나 모욕적인 일을 하고 왔기 때문에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다는 편견 때문이었다. 나라가, 사회가, 부모형제가 지켜주지 못해 억지로 끌려간 그녀들. 살기 위해 강제로 고초를 겪고 왔는데, 정작 고향에서는 그 아픔을 위로해 주기는커녕 반겨 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서글프고 비굴한 역사는 이후로도 되풀이된다.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소녀들을 우리 사회는 쉬쉬 하며 한동안 잊고 지냈다. 피해자가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죄인처럼 조용히 살아가야 했다. 위안부로 살며 희생된 소녀들의 아픔, 위안부의 기억을 흉터로 간직한 채 평생을 악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통, 위안부라는 이름을 애써 기억에서 지우려 했던 죄책감을 빚으로 떠안고 사는 부채감. 그 모든 한(恨)이 지금 우리 사회에 가득 스며 있다.


조정래 감독의 ‘귀향’은 그 응어리를 풀어내는 진혼굿이다. 우리 사회가 보듬어 풀어 주지 못한 한을 굿이라는 제의의 형태를 통해 씻어 내고 있다. 영매(靈媒)의 자리에는 위안부 소녀들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처지의 성폭력 피해 소녀 '은경(최리 분)'을 세웠다. 은경은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 소녀를 안아 주지 못한 부모들 이후의 세대이다. 위안부의 진실이 어린 무녀 은경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는 극의 형식은, 위안부의 실상이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서 너무 늦게 세상에 알려진 실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온 주변 사람들은 무당이 등장한 점이 아쉬웠다고 했다. 극의 전개에 크게 상관없는 듯한데, 무당이 등장하니 어쩐지 무서운 마음이 더 들었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무당이 등장하여 상처받은 영혼의 속사정을 제대로 듣고, 원통한 마음을 굿으로 풀어 주는 설정이 지금 우리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듯해서 더 마음이 아팠다. 나라가, 사회가, 부모형제가 희생된 개인들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굿판을 통해서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현실. 그 얼마나 참담한가?


상처받은 이들의 치유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가해자들과 굴욕적인 타협을 하고, 그것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겁박하는 사회. 최소한의 양심을 기억으로 남긴 소녀상을 그 옛날의 일본군들처럼 또 한 번 짓밟고 꺾어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세력. 이 부당한 현실의 상황에서 영화 ‘귀향’은 살아남은 자들이 전하는 사죄의 메시지다. 그렇기 때문에 뻔히 예상되는 스토리에도 마음이 꺼지고 눈물이 난다.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을 잃고 장례를 치를 때였다. 고인의 생전에 소홀했던 죄책감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가 어느 새벽에 대성통곡을 하며 지난 잘못을 다 토해냈었다.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난 후에야 고인의 명복을 제대로 빌 수 있었다. ‘귀향’을 보고 난 후에 그때의 기분을 느꼈다. 책과 뉴스에서 접해서 머리로만 알고 있던 위안부의 역사는 영화에서 그려진 모습을 통해 가슴에 통증으로 새겨졌다. 그 통증과 함께 위안부 문제에 무심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난 후에야 그들의 영혼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귀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고, 우리 사회는 슬픈 역사까지도 끌어안고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성숙함의 단계로 들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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