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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Feb 23. 2016

파리의 한국남자

사랑의 의미를 찾는 쓸쓸한 여정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구경하는 여행지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가이드의 욕망으로 해석된 곳에는 화려한 이미지들이 가득합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경계 너머 세상의 것들. 그것들은 내 일상의 초라한 구멍을 채우며 쪼그라들었던 욕망에 포만감을 줍니다. 그렇게 낭만적인 이국땅의 이미지 속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낍니다.


어느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업무 차 동료들과 영국에 갔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생활과 업무를 위해 직접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비싸고, 불편하고, 겁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평소와 비교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불평으로 자랄 만큼 이국땅은 황폐한 공간이었습니다. 곳에서 나는 가진 것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전수일 감독의 ‘파리의 한국남자’에는 이국땅의 두 가지 풍경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영화는 상호(조재현 분)가 파리에서 신혼여행 중에 잃어버린 아내 연화(팽지인 분)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파리의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여유가 있고 화려함이 넘칩니다. 그 속에서 상호와 연화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하나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차를 마시다 상호가 담배를 사러 간 사이에 연화는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 이후로 2년여 간을 상호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노숙을 하며 연화를 찾아다닙니다. 상호가 잠을 자고 돌아다니는 파리의 모습은 더럽고, 냄새 나고, 어둡습니다.


화려했던 세상이 우울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 어딘가에서 본 듯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사랑’의 과정이 그 모습과 닮아 있네요. 연애를 시작할 때, 세상은 온통 아름답습니다. 내가 바라던 이성을 만나 하나의 완전체가 되고 나면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세상에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이상적인 상태에 있다는 환상에 취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낭만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연애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두 연인은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외로움입니다. 연애를 하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너도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 줘야 해.’ 그러나 이 사랑의 요구는 연인들의 갈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점점 더 큰 욕망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상대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는 연인.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상대에게서 또 하나의 내 모습만을 볼 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며 끝없이 욕망 속을 헤매게 됩니다. 아름다웠던 주변은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들로 가득합니다. 그 모습이 쓸쓸하고 우울합니다.


상호는 연화가 스스로 자신의 곁을 떠났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가 된 그녀의 마음도 자신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실종에 대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되찾고 난 후에 어떻게 할지도 계획한 일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녀를 찾는 일에만 매달립니다. 그런데 말이죠, 어쩌면 연화는 스스로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 사랑을 요구하던 그녀. 그 요구를 채워 주기 위해 상호는 노력했지만, 유리면에 맺힌 성행위의 모습은 허상으로 다가옵니다. 그 허상의 허탈함에서 연화의 요구는 채워지지 않았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결핍이 연화를 떠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뜻밖의 제보로 연화의 소재를 듣게 된 상호는 연화를 찾아 떠납니다. 처음의 파리에서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는 세상 속에서 연화를 만난 듯합니다. 그리고 하나됨을 상징하는 표시로 간직했던 결혼반지를 통해 아니러니하게도 연화가 자신과 동일시될 수 없는 타자(他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이 빠져 나가는 구멍을 느끼게 되고,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상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랍니다. 상대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떠나기를...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는 둘이 합쳐 하나가 아닌, 둘이 어우러져 희열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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