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의미를 찾는 쓸쓸한 여정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구경하는 여행지는 환상의 세계입니다. 가이드의 욕망으로 해석된 그곳에는 화려한 이미지들이 가득합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경계 너머 세상의 것들. 그것들은 내 일상의 초라한 구멍을 채우며 쪼그라들었던 욕망에 포만감을 줍니다. 그렇게 낭만적인 이국땅의 이미지 속에 비친 나의 모습에서 나는 비로소 행복을 느낍니다.
어느 해였습니다. 이번에는 업무 차 동료들과 영국에 갔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생활과 업무를 위해 직접 부딪쳐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현실은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비싸고, 불편하고, 겁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평소와 비교해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이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고 싶은 욕망이 불평으로 자랄 만큼 이국땅은 황폐한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가진 것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전수일 감독의 ‘파리의 한국남자’에는 이국땅의 두 가지 풍경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영화는 상호(조재현 분)가 파리에서 신혼여행 중에 잃어버린 아내 연화(팽지인 분)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는 파리의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여유가 있고 화려함이 넘칩니다. 그 속에서 상호와 연화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며 하나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차를 마시다 상호가 담배를 사러 간 사이에 연화는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 이후로 2년여 간을 상호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노숙을 하며 연화를 찾아다닙니다. 상호가 잠을 자고 돌아다니는 파리의 모습은 더럽고, 냄새 나고, 어둡습니다.
화려했던 세상이 우울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는 모습. 어딘가에서 본 듯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사랑’의 과정이 그 모습과 닮아 있네요. 연애를 시작할 때, 세상은 온통 아름답습니다. 내가 바라던 이성을 만나 하나의 완전체가 되고 나면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세상에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이상적인 상태에 있다는 환상에 취해서 바라보는 세상은 낭만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연애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두 연인은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외로움입니다. 연애를 하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너도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 줘야 해.’ 그러나 이 사랑의 요구는 연인들의 갈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점점 더 큰 욕망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상대의 모습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만을 보는 연인. 사랑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에 우리는 상대에게서 또 하나의 내 모습만을 볼 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결핍에 시달리며 끝없이 욕망 속을 헤매게 됩니다. 아름다웠던 주변은 정착하지 못하는 이방인들로 가득합니다. 그 모습이 쓸쓸하고 우울합니다.
상호는 연화가 스스로 자신의 곁을 떠났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가 된 그녀의 마음도 자신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실종에 대한 이유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되찾고 난 후에 어떻게 할지도 계획한 일이 없습니다. 오로지 그녀를 찾는 일에만 매달립니다. 그런데 말이죠, 어쩌면 연화는 스스로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 사랑을 요구하던 그녀. 그 요구를 채워 주기 위해 상호는 노력했지만, 유리면에 맺힌 성행위의 모습은 허상으로 다가옵니다. 그 허상의 허탈함에서 연화의 요구는 채워지지 않았음이 느껴졌습니다. 그 결핍이 연화를 떠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뜻밖의 제보로 연화의 소재를 듣게 된 상호는 연화를 찾아 떠납니다. 처음의 파리에서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는 세상 속에서 연화를 만난 듯합니다. 그리고 하나됨을 상징하는 표시로 간직했던 결혼반지를 통해 아니러니하게도 연화가 자신과 동일시될 수 없는 타자(他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호는 순식간에 모든 것이 빠져 나가는 구멍을 느끼게 되고,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 상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바랍니다. 상대와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찾아 떠나기를...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는 둘이 합쳐 하나가 아닌, 둘이 어우러져 희열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를...